낭만이 넘치는 쿠바여행 (10) 아바나
어마어마한 파도가 방파제를 덮치는 찰나, 하얗게 부서지는 물벼락을 맞으며 말레콘 해안도로를 달리는 핑크빛 올드카. 이 장면이야말로 쿠바라는 곳을 떠올릴 때마다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한 장의 이미지가 아닐까. 한 번도 발을 들여놓지 않은 미지의 세계, 쿠바 아바나에 도착한 그 밤에 캄캄한 길을 더듬어 찾아간 곳도 역시 말레콘이었으니까. ‘카메라 셔터만 누르면 작품이 된다’는 쿠바 아바나. 그 중에서도 말레콘은 ‘분노의 질주: 더 익스트림’처럼 스타일리시한 영화들의 인기 촬영지였고, 최근에는 국내 드라마에도 등장해 겨울잠 자던 여행세포를 흔들어 깨웠던 낭만의 여행지이다. 왜 말레콘은 설렘의 감정을 최대치로 끌어올려주는 것일까.
말레콘, 아바나의 시작이자 끝
이른 아침, 카리브의 황금빛 햇살 세례가 말레콘 위로 쏟아진다. 진한 쿠바 커피의 빛깔을 닮은 올드 아바나의 실루엣이 그림같이 펼쳐지고, 드넓은 해안도로는 검푸른 대서양 바다를 끼고 끝 간 데 없이 뻗어 있다. 말레콘에 걸터앉아 바라보는 아바나의 석양이 낭만적이라면, 말레콘의 일출은 가슴 벅찬 빛의 향연이다.
원래 말레콘(Malecon)은 스페인어로 방파제라는 뜻이다. 말 그대로 말레콘은 거친 바다로부터 도시를 지켜주는 평범한 콘크리트 제방이지만, 아바나의 말레콘은 지구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자적인 의미를 가진다. 1959년 피델 카스트로의 쿠바혁명, 1961년 미국과 국교 단절, 이어진 1962년 미국의 쿠바 봉쇄. 그 이후 50여 년간 바깥세상으로부터 유폐당한 섬나라, 쿠바. 이때부터 말레콘은 철저하게 고립된 쿠바라는 세상의 시작이자 끝이 됐다. 더 나아갈 수도 나아가서도 안 되는 금지된 선. 이보다 더 쿠바의 정체성을 잘 대변해주는 아이콘이 있던가.
올드 아바나에서 신시가지 베다도까지, 말레콘의 길이는 8㎞. 정확히 말하면 말레콘을 끼고 있는 해안도로의 길이다. 길의 시작점인 올드 아바나 구간은 1982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지역이다. 1500년대 스페인 식민지 시대의 건축물과 1900년대 아르데코와 신고전주의 양식 건물들이 해안도로를 따라서 동쪽으로 뻗어 있다. 고색창연한 건축물은 멀리서 보면 근사해보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상처투성이다. 카리브해의 날카로운 햇빛과 거친 해풍이 사정없이 할퀴고 지나간 흔적이다.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8㎞의 자유
궁하면 통한다! 놀라운 반전은 이때부터다. 경제봉쇄로 결핍이 일상이 된 아바나 사람들은 ‘아무것도 없어서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역설’을 자신들의 삶에 적용했다. 없으면 만들어 쓰고, 있는 것은 고쳐 쓰고, 더 쓸 수 없으면완전히 새로운 용도로 변신시키는, 그들은 ‘재활용의 달인’이 됐다. 결핍을 장애가 아니라 무궁무진한 창의력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말레콘과 올드카다.
가난한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 입장료 없는 살사댄스 클럽, 거리 음악가의 버스킹 무대, 무념무상을 낚는 낚시터…. 말레콘은 아바나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모든 역할을 척척 소화해낸다. 그곳에 방파제 말고 무엇이 있나. 아무것도 없으니까 상상만 하면 무엇이든 가능하다. 아바나 사람들에게 말레콘이란 절대 없어서는 안 되는 ‘생활의 중심’, 아니 그 이상의 존재다. 여기서 마주친 삶의 아이러니! 아바나 사람들의 숨통이 돼준 말레콘은 쿠바 봉쇄로 아바나의 숨통을 조이던 미국이 1900년대 초 건설해준 것이라는 사실.
고립이 만든 이색적인 진화, 올드카
핫핑크, 레드, 라임, 스카이블루…. M&M 초콜릿처럼 톡톡 튀는 컬러의 차가 말레콘을 질주한다. 아바나의 명물인 1950년대 생산된 미국산 올드카들이다. 지구상이 아니라 외계에서 뚝 떨어진 것 같은 요상한 풍경 속에 있으면, 지금이 1950년대인지 2000년대인지 현실 감각이 서서히 사라진다. 휘리릭~ 긴 실크 스카프를 휘날리며 여성 관광객이 올드카를 타고 지나간다. 한껏 기분을 낸 모습이 마치 1950년대 여배우 같다. 너무 뻔하고 상투적이지만, 올드카 투어는 여전히 여행자의 로망을 펌프질하는 필수 관광코스다.
올드카를 탈 수 있는 스폿 중 하나는 올드 아바나의 아르마스광장 근처 해안도로. 청력장애인 드라이버의 모험을 다룬 영화 ‘베이비 드라이버’의 남자 주인공 안셀 엘고트를 닮은 잘생긴 드라이버와 요금 흥정에 성공하고, 말레콘 해안도로를 따라 나시오날호텔 앞까지 신나게 달렸다. 2016년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이 묵었던 나시오날호텔은 쿠바의 역사적인 명소다. 절벽 위 하얀 성 같은 호텔을 배경으로 올드카 위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엘모로성까지 한 바퀴를 돌면 보통 1시간이 걸린다. 가격은 외국인 전용 현지통화로 50쿡 정도(대략 50달러). 코스와 시간은 협의하기 나름이다.
1953년형 뷰익, 1958년생 쉐보레, 선더버드, 캐딜락, 포드…. 올드카의 겉모습은 클래식한 옛모습 그대로인 것 같지만, 속은 완전히 새롭게 개조된 전혀 다른 차다. 1950년대에 미국에서 수입된 자동차들이 여태껏 살아남아 ‘쿠바의 올드카’라는 완전히 다른 생태종으로 자체 진화한 것이다. 1959년 미국의 쿠바 봉쇄로 새 차를 수입하는 길이 막히고, 고장이 나면 부품을 구할 수 없어서 뚝딱뚝딱 고쳐 쓰다 보니 생겨난 ‘웃픈’ 현상이다. 연식과 차종은 같아도 똑같은 차는 하나도 없다.
아바나에선 모순과 혼란, 반전을 즐겨라
50여 년간 사회주의 공산국가의 아이덴티티를 굳건하게 지켜온 쿠바. 아바나 호세마르티공항에 도착했을 때, 제일 처음 느낀 혼란은 공항에 떡하니 붙어 있는 우리나라 모 기업의 휴대폰 광고였다. 공산국가에서 자본주의의 첨병인 광고라니. 게다가 쿠바의 의사 월급이 외국인용 현지통화로 25쿡(약 25달러) 정도라는데 저 비싼 휴대폰을 누가 사는 걸까. 연이어 다가온 두 번째 혼란은 고급 호텔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화장실에 변기 뚜껑이 없다는 것이다. 도무지 어떻게 변기에 앉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그렇게 없는 대로 살아왔다는 것이 쿠바인들의 답변이다.
쿠바인의 혁명영웅 체 게바라는 아바나의 기념품 가게에서 ‘쿠바 혁명이라는 상품’을 파는 주역이다. 그의 잘생긴 얼굴은 싸구려 티셔츠, 베레모, 열쇠고리 등 관광 상품이 돼 사방팔방에서 돈을 벌고 있다. 노벨상 수상 인터뷰에서 ‘최초의 입양 쿠바인’이라고 말했던 미국의 대문호 헤밍웨이. 쿠바인보다 쿠바를 더 사랑했지만, 쿠바혁명 이후 미국인이라는 이유로 추방됐다. 요즘은 아바나에 있는 그의 단골 술집들이 그를 다시 불러들여서, 생전에 그가 좋아하던 칵테일로 떼돈을 벌고 있다. 엘 플로리디타에서는 다이키리를, 라 보데기타에서는 모히토를. 사회주의 국가임이 무색하게도 이들은 모두 마케팅의 귀재다. 더 재미있는 사실은 라 보데기타에서 칵테일을 만드는 바텐더들이 국가 공무원이라는 것. 이처럼 아바나는 모순과 혼란 사이를 오고 가지만, 재미있는 반전도 가득한 곳이다. 쿠바의 매력에 한번 빠지면 출구가 없어서, 여행 후유증이 크다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다.
아바나=글·사진 정윤주 여행작가 traveler_i@naver.com
여행 정보
쿠바 수도 아바나는 크게 올드 아바나, 센트로 아바나, 베다도로 나뉜다. 관광지는 올드 아바나에 집중돼 있다. 쿠바는 이중 통화를 사용한다. 외국인용 현지 통화는 쿡. 1쿡은 대략 1달러가 좀 넘는다. 환전은 공항에서 하는 것이 편하다. 올드 아바나에 있는 환전소는 줄이 길다. 1년 중 우기는 5~10월, 건기는 11~4월. 쿠바는 여름이 무덥고 비가 많이 온다. 겨울이 여행하기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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