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중앙은행이 이달 13일부터 1000스위스프랑(약 112만원) 지폐 신권 유통을 시작한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유럽에서도 대표적인 부자 나라로 손꼽히는 스위스에서는 우리나라 최고액권인 5만원보다 가치가 무려 20배가 넘는 지폐가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1000스위스프랑권은 세계에서 실질 가치가 가장 높은 지폐입니다.
스위스는 사실 이미 100년도 더 전인 1907년부터 1000스위스프랑 지폐를 사용해왔습니다. 이번 신권은 9번째 개정판입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 1000스위스프랑 지폐에 대한 관심이 유난히 높아지고 있습니다. 유로존 국가(유로화 사용 19개국)들의 화폐 정책을 담당하고 있는 유럽중앙은행(ECB)에서는 올 초부터 최고액권인 500유로(약 64만원) 지폐 발행을 중단했기 때문입니다.
유럽에서는 스위스 중앙은행도 ECB처럼 1000스위스프랑과 같은 고액권 유통을 중단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습니다. ECB에서는 500유로권 발행 중단 계획 발표 당시 해당 지폐가 테러·범죄에 악용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라고 원인을 설명했습니다. 실제 500유로 지폐로 100만 유로(약 13억원)를 만들면 2.2㎏ 밖에 되지 않습니다. 50유로(약 6만원) 지폐로는 20㎏이나 나간다고 합니다.
500유로 지폐는 그 동안 탈세, 돈세탁과 테러 단체의 자금조달 수단으로 악용된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2001년 9·11 테러의 배후였던 알 카에다가 대규모 테러자금 조달에 500유로 지폐를 사용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 지폐에는 ‘오사마 빈 라덴’ 이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습니다.
1000스위스프랑도 상황이 비슷한 것으로 보입니다. 한 가지 재미난 사실은 현재 스위스에서 유통되고 있는 화폐 금액의 3분의 2가 1000스위스프랑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스위스의 물가가 높다고 한들 일반 시민들이 한 장에 100만원이 넘는 지폐를 그렇게 많이 들고 다니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대부분 돈세탁과 탈세 등에 활용되고 있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는 대목입니다.
고액권 유통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나라는 비단 유럽 국가들뿐만이 아닙니다. 워싱턴포스트(WP)는 지난 4일 미국 화폐 중 100달러(약 11만원)짜리 화폐가 가장 많이 돌아다니고 있는 현실에 문제가 있다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전달했습니다. WP는 1달러(약 1100원)권보다도 더 많이 유통되고 있는 100달러권의 80%가 미국 영토 밖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달러화가 불순한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주장의 근거로 들었습니다. 래리 서머스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는 “탈세나 범죄 목적으로 고액권 화폐를 쟁여두고 있는 사람이 많을 것”이라며 100달러 지폐 유통 중단 필요성을 피력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고액권이 과도한 물가 상승, 즉 하이퍼인플레이션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라는 비판도 있습니다. 고액권 지폐는 시민들의 무분별한 소비를 부추길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경우 경제가 고속성장하는 와중에도 지나친 물가 상승을 우려해 100위안(약 1만7000원)을 넘어서는 화폐 발행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스위스의 높은 물가가 1000스위스프랑과 같은 고액 화폐 사용 탓이라는 관측을 내놓기도 합니다.
이렇듯 다양한 문제의 원인을 제공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 스위스 내부에서도 1000스위스프랑권 발행 중단에 대한 요구가 커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스위스 정부는 이러한 방안을 고려하지 않고 있습니다. 스위스의 물가가 다른 나라들에 비해 높다는 것과 신용카드보다 현금을 선호하는 스위스 국민들의 문화 때문이라는 설명입니다. 스위스와 유로존의 사례는 10만원권 발행을 시작해야 한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는 우리나라에 대해서도 여러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연일 기자 neil@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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