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고구마와 바나나

입력 2019-03-11 17:22  

이대훈 < 농협은행장 leedaehoun@nonghyup.com >


우리 주변에는 너무 흔해서 그 소중함을 깨닫지 못했던 존재가 많이 있다. 그 대상은 사람의 취향에 따라 천차만별이겠지만, 요즘 필자의 머릿속에는 전 국민의 건강식품으로 각광받고 있는 고구마가 떠오른다.

어린 시절 보릿고개를 경험했던 베이비붐 세대에 고구마는 고마움의 대상이자 그리운 추억의 편린이다. 쌀과 보리를 대신해 허기를 달래줬고, 추운 겨울에는 위안이 돼줬다. 날고구마를 깎아 과일처럼 먹기도 했고, 겨울철 점심에 김치와 물고구마를 함께 넣어 갱시기죽으로 먹기도 했다. 겨울밤에 동네 친구들과 화롯가에 둘러앉아 군고구마나 삶은 고구마를 먹으며 담소를 나누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한때 끼니를 대체했지만 1980년대 이후 먹거리가 넘쳐나면서 쳐다보지도 않았던 고구마가 지금은 최고의 다이어트 식품으로 탈바꿈했다. 고구마의 풍부한 식이섬유는 포만감을 높여 과식을 막을 수 있고, 칼륨은 근육 수축을 완화하고 신장을 보호하며, 비타민C는 체내 활성산소를 제거해준다. 그야말로 다이어트에 제격이다. 소비자들이 건강에 관심을 보이면서 고구마의 가치가 새롭게 조명된 것이다. 또 우수한 영양성분과 손쉬운 재배방식 덕분에 미국 항공우주국(NASA)이 우주정거장에서 고구마를 재배하는 연구를 시도했을 정도다. 이제는 ‘밥 대신 고구마’가 아니라 ‘밥보다 고구마’로 불릴 정도로 가치가 올랐다.

바나나는 반대 상황에 놓였다. 불과 30년 전만 해도 바나나는 부잣집 제사상이나 특별한 날 아니면 구경도 못하는 참으로 귀한 과일이었다. 하지만 수입이 본격화되면서 바나나값이 점점 떨어졌고, 이제는 누구나 쉽게 먹을 수 있는 대중적인 과일이 됐다. 예전 소풍날에나 한두 개 먹었던 ‘추억의 바나나’는 사라진 것이다. 이렇듯 고구마와 바나나의 처지가 뒤바뀐 것을 보면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낀다.

세상의 모든 것은 시간이 흐르면서 그 가치가 변한다. 여기에 새로운 이름이나 의미를 부여하면 언젠가는 소중하고 특별한 존재로 다가올 것이다. 단지 너무 흔해서, 늘 가까이에 있어서 그 가치를 몰랐던 것뿐이다. 시인 김춘수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시구처럼 우리 삶의 천덕꾸러기 같은 존재에게도 새로운 이름을 불러준다면 그 가치가 빛을 발할 것만 같다.

우리네 인생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필자를 포함한 5060세대는 쉼 없이 앞만 보고 달려오지 않았나 싶다. 자신의 인생에 가치를 부여하고 주변에도 작은 관심과 의미를 부여한다면 훨씬 풍성한 삶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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