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광엽 기자 ] “영국의 공기는 노예제를 용인하기에는 너무 맑게 된 지 오래됐다.”
1772년 런던 민사법원 제임스 맨스필드 판사의 기념비적 노예 석방 판결이다. 탈주하다 붙잡힌 흑인 노예 소머셋을 무죄 방면하면서 ‘공기’를 근거로 든 이 판결은 세계 노예제 폐지운동을 불 붙였다. ‘맑게 된 지 오래된 공기’는 당시 산업혁명 태동과 함께 등장한 주체적 개인과 자유시민들의 새로운 사회를 향한 열망을 담은 은유였다.
맨스필드 판사가 예민한 후각으로 감지한 ‘자유의 공기’는 영국을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부상시켰다. 대서양을 건너 미국독립혁명(1776년)으로, 도버 해협을 넘어 프랑스혁명(1789년)으로도 이어졌다. 당대의 철학자 헤겔이 적군인 나폴레옹의 독일 진입 행렬을 접하고 “나는 말을 탄 시대 정신을 보았다”며 감격스러워한 것도 영국과 프랑스를 거친 자유시민 정신이 조국으로 유입되기를 염원해서였다.
걱정스런 자유·법치의 후퇴
세상만사는 ‘공기’에서 성패가 좌우된다. 군사정변조차 동시대인들이 도달한 교양과 문명의 눈높이를 맞춘다면 혁명이 되고, 아니면 쿠데타가 된다. 자칭 ‘촛불혁명 정부’라면 이런 이치에 정통해야 할 터인데도, 눈앞의 현실에선 시대의 공기를 역류하는 퇴행이 더 크게 보인다. 우리는 해방 이후 70여 년 동안 갖은 시련 속에서도 자유·법치·시장·개방이라는 맑은 공기를 호흡해 왔다. 그렇게 단련된 이들에게 ‘우리만 선(善)’이라는 독선은 본능적 거부감을 부를 수밖에 없다.
자유에 대한 의구심은 동시다발적이다. 다른 견해에 ‘적폐’ 딱지를 붙이고 인터넷에서까지 몰아내려는 집요함이 엿보인다. 5·18, 위안부 등에 대한 사실 논쟁이나 학술적 접근마저 봉쇄하려는 움직임도 우려스럽다. ‘사상의 공개시장에서 진실과 거짓이 경쟁케 하라’던 표현의 자유에 대한 확립된 명제가 ‘자유인의 공화국’이 된 지 오래인 한국에서 시험받고 있는 것이다.
법치의 후퇴도 목격된다. 대법원의 공무원 해직 판결을 특별법으로 무력화하겠다는 발상은 도발적이다. 검찰은 ‘여권 실세’의 1·2심 재판장을 모두 ‘사법농단 판사’로 싸잡았다. 사법부 길들이기로 의심해 볼 정황이 차고 넘친다. 판결이 불만이라며 판사 탄핵을 거론하는 여당과 숨죽인 대법원장 모습은 영화 속 장면처럼 비현실적이다.
시장·개방 '성공법칙' 외면말아야
시장을 경시하는 행태도 뚜렷하다. 국민연금을 지렛대로 한 정부의 기업경영 개입은 경제를 정치에 종속시킬 것이다. 법원 판결과 배치되는 ‘유치원 3법’으로 사립유치원 설립자들이 경영에서 배제되고, 시설은 사실상 임의 몰수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북핵 해결을 위해서라며 ‘닥치고 경협’에 매달리고, 동맹에 거친 비난도 마다하지 않는 ‘우리민족끼리’식 해법 고집은 ‘개방과 협력’이라는 지금까지의 성공 법칙에 대한 비합리적 부정이다.
가장 걱정되는 대목은 맑은 공기가 불러온 자주와 자유의 역사에 대한 오해다. 문재인 대통령은 3·1절 기념사에서 ‘친일로 얼룩진 역사를 바로 세우자’고 했다. 사실관계를 오인한 자학적 역사인식이다. 신생 대한민국 정부의 대통령 부통령 국무총리 국회의장 대법원장 등 요직과 내각의 대부분을 항일·독립운동가들이 차지했다는 점만 봐도 ‘친일파가 득세한 나라’라는 주장의 과장은 분명해진다.
불가역적 단계로 진입한 자유의 시대에 이분법적이고 시대착오적 이념을 강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판이다. 한국의 ‘공기’는 반자유, 반법치, 반시장을 용인하기에는 맑아진 지 오래다. 미세먼지가 기승을 부려도 깨끗하고 파란 하늘빛 공기를 언제까지 가릴 수는 없다.
kecore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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