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진의 와일드 노마드 라이프 (3)
美食의 도시 미국 시애틀
"시애틀 알아?" 하고 물으면 돌아오는 답. "영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의 그 시애틀?" 좀 더 젊은 어떤 이는 현빈과 탕웨이의 멜로 영화 '만추'를 운운한다. 이들에게 시애틀은 영화 시나리오만큼이나 추상적인 장소일 확률이 높다.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보잉 등 글로벌 기업의 본사가 있는 곳' 정도의 정보를 읊는 이들은 그 도시에 한 번쯤 가 봤거나 적어도 누군가의 여행기를 살펴 읽은 적이 있을 것이다. 현재까지 언급한 이 여섯 개의 단어는 시애틀 여행을 주제로 한 글에서 닳고 닳은 레퍼토리처럼 따라붙는다.
이 도시에서 저 단어들을 빼면 뭐가 남을까? 시애틀로 향하는 세 번째 여정에서 내가 품은 질문은 이랬다. 날씨? 단언컨대, 이 도시의 땅값이 비슷한 문화적 환경을 갖춘 샌프란시스코만큼 치솟지 않은 건 순전히 날씨 때문일 것이다. 11~5월, 1년의 절반이 넘는 이 기간이 ‘우기’인 도시. 기상청에서 발표한 월별 평년값에 의하면 시애틀의 겨울엔 한 달 중 12~15일가량 비가 내린다. 시애틀에서 태어나 평생을 이 도시에서 산 사람이라면 인생의 절반을 비와 함께 보내는 셈이다.
세 번의 방문과 경험으로 갖게 된 시애틀의 인상은 이렇다. 오랜 시간 쌓아온 견고한 독립 문화. 유행을 좇는 대신 자신의 취향이 분명한 이들이 지지받는 도시. 미국 오리건주의 포틀랜드와 뉴욕주의 브루클린, 독일의 베를린 같은 도시가 ‘핫’하다, ‘쿨’하다는 수식어를 사이좋게 나눠 갖기 전에 이 단어들은 꽤 긴 시간 시애틀의 것이었다. 지금은 세계적인 브랜드가 된 시애틀의 대표적 ‘산물’ 스타벅스가 오늘날의 성공을 이룰 수 있었던 건 어느 날 생긴 항구 앞 작은 카페가 선보인 ‘새로움’을 편견 없이 받아들인 지역민 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유함과 독특함, 창의적인 것을 존중하는 이 흐름은 시애틀의 미식 문화를 다채롭게 만든 공신이다. 머문 이레 동안 매일 수만 보씩 걸으며 탐식과 폭식 사이를 종횡한 이유. 아침부터 밤까지 끼니와 끼니 사이에 두는 틈마저 무시하고 쉴 새 없이 배를 채웠던 시애틀 ‘먹방’의 자취를 공개한다.
브런치는 시장에서,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
여행의 첫 아침은 대개 여독과 시차로 잠을 설친 뒤 주린 배를 붙들고 숙소 조식당을 어슬렁거리는 일로 시작된다. 빵과 버터, 베이컨과 계란이 거의 전부인 조식에 큰 포부가 있는 게 아니라면, 든든히 껴입고 나서야 할 곳이 있다. 100년 하고도 10여 년을 더 보탠 세월 동안 시애틀 사람들의 식탁을 지켜온 전통시장,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이다.
도시의 첫 번째 길, 퍼스트 애비뉴를 따라 걷다 보면 외면하려 해도 눈에 띄고야 마는 시장의 붉은 간판이 나타난다. 이른 아침부터 시장 입구를 가득 채운 인파, 뒤섞인 세계의 언어들, 카메라 셔터 소리, 생선장수들의 유쾌한 고함이 뒤섞여 생동하는 풍경이 펼쳐진다. 시애틀시에선 한 해 무려 10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이곳을 방문한다고 자랑한다. 시장 한복판에 서면 그 숫자가 허풍이 아니라는 것을 곧장 깨달을 수 있다.
바다에 면한 도시에서 가장 싱싱한 에너지가 넘치는 곳은 두말할 것 없이 생선가게다.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에서 가장 유명한 명물이기도 한 이곳엔 풋볼 선수의 어깨를 가진 건장한 청년들이 포진해 있다. 그 앞에 선 당신이 곧 보게 될 장면. 가판대 위에서 럭비공처럼 날아다니는 포동포동한 생선들! 난타 공연을 방불케 하는 이 퍼포먼스는 시장을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공간이 아니라 재미와 즐길거리가 있는 곳으로 만들고자 했던 상인들의 아이디어다. 이 기발한 발상으로 1986년 파산의 위기를 겪었던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은 멈출 뻔했던 역사를 현재까지 잇고 있다.
생선과 전통 말고도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의 매력은 무궁하다. 2년 전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과 엘리엇베이 사이에 들어선 ‘마켓 프런트’는 시애틀이 기대하는 시장의 미래다. 2700여㎡ 부지에 들어선 이 공간엔 지금 이 도시의 젊은 세대들이 사랑하는 수제 맥주 양조장과 펍, 해산물 레스토랑, 카페 등이 늘어서 있다. 엘리엇베이의 운치를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전망대, 지역 공예인들이 만든 작품과 소품을 살 수 있는 ‘크래프트 마켓’도 이곳으로 향하는 발걸음의 이유가 된다.
시장을 충분히 돌아볼 시간과 여력이 없다면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과 마켓 프런트를 ‘속성’으로 둘러보며 배를 채우는 ‘세이버 시애틀 푸드 투어’의 아침 프로그램을 이용해볼 것. 오전 8시부터 약 2시간 동안 지역민만 아는 시장 내 숨은 맛집에서 16가지 이상의 음식을 시식할 수 있다. 시애틀 미식 여행의 ‘미리보기’를 경험할 수 있는 알찬 기회다.
커피를 위한 날씨, 커피를 위한 도시
커피가 여행의 목적이 될 수 있을까? 다녀본 몇 개의 도시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시애틀은 그중 앞순위에 있는 도시다. 실제로 이 도시를 찾는 많은 이들이 카페를 관광 목록에 반드시 끼운다.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 골목에 있는 스타벅스 1호점은 스페이스 니들(한국의 남산서울타워 격)보다 더 붐비는 랜드마크가 됐다. 패키지 투어에 발 묶인 이가 아니라면 좀 더 부지런을 떨어보자. 캐피톨 힐에 있는 스타벅스 리저브 로스터리&테이스팅 룸은 브랜드가 지향하는 커피 문화와 스페셜티 커피의 최신 흐름을 경험할 수 있는 곳. 문을 열고 들어서면 공장을 방불케 하는 로스터리의 규모에 한 번, 다양한 커피 원두와 사재기 욕구를 자극하는 세련된 디자인 소품과 기념품에 두 번 놀란다.
믹스 커피와 프랜차이즈 브랜드 커피 너머 스페셜티 커피 세계에 호기심 혹은 취향이 있다면 시애틀은 구미 당기는 진열장이다. 시애틀에서 가장 오래된 독립 카페 ‘비앤오 에스프레소’, 시애틀 독립 커피의 초기 문화를 형성한 ‘커피 메시아’와 ‘비바체’는 낡고 따뜻하고, 음악이 좋은 공간에 끌리는 이를 위한 목록. 실험적인 로스팅과 현대적인 인테리어, 커피를 기반으로 한 밀레니얼 세대의 문화는 엘름 커피 로스터스, 퀘드, 스텀프 타운 커피 로스터스 등에서 경험할 수 있다.
블로그나 가이드북이 소개하지 않는 비밀스러운 장소는 이 지역에 사는 이의 안내를 받아야 한다. 시애틀에 친구가 없어서 불가능하다고? 걱정은 붙들자. ‘로드 독스 시애틀 브루어리’에서 운영하는 ‘커피 봉고’에 오르면 된다. 가이드와 함께 1940년대에 생산된 로스팅 기계에서 장작불로 원두를 볶아내는 ‘아파시오나토’, 시애틀에서 3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움브리아’ 등 서너 군데 카페를 순회하면서 살뜰한 반나절을 보낼 수 있다. 갓 내린 진한 커피 한 잔을 두 손으로 감싸고 향을 음미하다 보면 시애틀의 소슬한 날씨-커피 맛을 돋우는-마저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양조장에서 즐기는 와인 한 잔
나파와 소노마의 협곡 사이에서 난 캘리포니아 와인이 미국 와인의 전부는 아니다. 시애틀이 면한 워싱턴주에도 비옥한 포도밭이 있다. 워싱턴 와인의 ‘얼굴마담’은 짙고 우아한 풍미의 카베르네 소비뇽과 메를로. 그 밖에 쉬라, 리슬링, 샤르도네 등 다양한 품종의 포도로 빚은 와인도 생산된다.
와인 산지의 기후 조건으로 치명타에 가까운 ‘비’가 많이 내리는 지역이 어떻게 와인으로 이름을 날릴 수 있을까? 미국의 저명한 와인 전문가 캐런 맥닐은 저서 《와인 바이블》에서 워싱턴주의 축복받은 기후를 고품질의 비결로 꼽는다. 이 괴상한 주장의 근거는 워싱턴주의 동과 서를 가르는 캐스케이드 산맥에 있다. 해양성 기후를 보이는 축축한 서부와 달리 산맥의 동쪽은 연평균 강우량이 15㎝ 이하인, 메마른 사막에 가깝다. 거기에 산맥 사이로 굽이쳐 흐르는 계곡과 강, 나파 밸리보다 높은 위도로 매일 캘리포니아보다 두 시간 이상 더 내리쬐는 뜨거운 볕, 평균 10도 이상을 넘나드는 일교차가 더해져 워싱턴주 포도알의 질을 완성한다. 당신이 저녁 식사를 위해 찾은 식당에서 ‘워싱턴산 와인’을 추천받는다면 콜롬비아 밸리, 야키마 밸리, 레드 마운틴 등의 산지를 확인해볼 것.
시애틀 시내에선 캐스케이드 산맥 너머의 포도원에서 빚은 와인들을 선보이는 양조장의 와인 창고도 종종 만날 수 있다. ‘로버트 람세이 와인 셀러’도 그중 한 곳. 와인 메이커 밥 로버트 람세이 해리스가 2005년 문을 연 이곳은 보르도, 부르고뉴와 함께 프랑스 3대 와인 산지로 꼽히는 ‘론’ 품종 와인을 워싱턴에서 재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가족, 친구와 함께 운영하는 소규모 와이너리로 한국에선 맛볼 수 없는 와인을 경험할 수 있다. ‘고전적인, 중후한, 강렬한’ 따위의 형용사로 묘사되는 레드 와인을 좋아한다면 들러봄 직하다.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오후 4~6시 사이 ‘해피 아워’에 방문하면 산지의 고품질 와인 한 잔을 단돈 2달러에 맛보는 행운을 누릴 수 있다.
미식가의 보물 동네, 캐피톨 힐과 발라드
데이트 장소로 인기 높은 곳이 곧 맛집이라는 논리. 시애틀에서 이 단어들은 물론 무용하다. 그럼에도 현지인의 맛집을 기어이 찾고 싶은 이, 구글 검색창 앞에서 방황하는 이들을 위해 힌트를 던지겠다. 예술가와 LGBT의 동네. 젠트리피케이션. 서울의 익선동과 성수동, 브루클린의 부시윅, 런던의 쇼디치에 감도는 분위기를 좋아한다면 시애틀엔 캐피톨 힐이 있다. 캐피톨 힐은 원래 지미 헨드릭스, 너바나, 펄잼, 커트 코베인이 거쳐간 펑크록의 성지로 이름을 알렸다. 가이드북은 커피사의 판도를 바꾼 스페셜티 커피의 흐름이 시작된 동네라고 부연한다. 록과 커피에 관심이 전혀 없어도 이 설명이 전하는 ‘느낌’은 파악했을 거라고 믿는다. 캐피톨 힐은 자유, 새로움, 파격 같은 단어와 어울리는 동네다.
멜로즈 마켓은 지금 캐피톨 힐의 정서를 대변하는 새로운 장소다. 1919년, 정비소와 가구 창고 등으로 사용됐던 이 공간엔 먹는 낙이 중요한 시애틀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식당이 몰려 있다. 정직하게 키운 지역 제철 식재료로 자연주의 식을 선보이는 시트카 앤드 스프러스를 비롯해 샐러드바, 라이프스타일 상점, 정육점, 꽃집 등을 지나다보면 시애틀 사람들이 추구하는 삶의 방식도 살짝 보인다. 단 한 곳만 갈 수 있다면 200여 년 전부터 시애틀에서 굴 양식장을 운영해온 회사에서 직접 문 연 ‘테일러스 셸피시 팜스 오이스터 바’를 추천한다.
시내에서 자동차로 30분, 새먼 베이에 면한 발라드는 시애틀 사람들이 주말 나들이, 데이트할 때 즐겨 찾는 동네. 19세기 북유럽 이민자들이 건너와 정착한 구역으로, 이국적인(미국의 기준에서 말이다) 건축물이 즐비하다. 자본주의의 나라답게 일찌감치 찾아온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지금은 이민자 대신 트렌디한 레스토랑과 카페, 상점, 갤러리 등이 들어서 있다. ‘유니크 바이츠’라는 슬로건을 앞세우며 고유한 미식 문화를 내세우는 시애틀의 수준을 가늠하고 싶다면 ‘마린 하드웨어’가 훌륭한 시험장이 돼줄 것이다. 시애틀의 저명한 셰프이자 사업가 이선 스토웰의 최신작으로 지역, 제철 식재료로 선보이는 셰프의 창작 요리를 와인 디렉터가 제안하는 워싱턴주 와인과 함께 곁들여 낸다. 여행의 마지막 밤, 시애틀과 깊어진 사랑을 확인하기에 더없이 낭만적인 공간이다.
류진 여행작가
글로벌 라이프스타일 매거진 ‘더 트래블러’, 패션 매거진 ‘코스모폴리탄’ 등에서 일하며 42개국 200여 개 도시를 여행했다. 유행의 흐름을 붙잡아 소개하는 일을 하다가 지치면 야생의 대자연으로 도망친다. 자연과 도시 사이에서 양다리 걸치며 사는 삶을 글로 쓴다.
시애틀=글 류진 여행작가 flyryu@naver.com
사진 류진/시애틀 관광청
여행 메모
바다를 낀 시애틀에서 해산물을 건너뛰면 섭섭하다. 양이 곧 맛인 대식가라면 엘리엇 베이의 ‘솔티스 온 알키스 비치 시푸드 그릴’에서 주말 브런치 뷔페를 즐겨보자. 테이블 위 새우, 게, 생선, 조개 등 장르를 망라한 해산물 파티가 끝없이 펼쳐진다. 탁 트인 바다와 맑은 공기, 다운타운의 마천루를 한품에 안을 수 있는 전망은 덤이다. ‘아이바스 살몬하우스’에선 미국 인디언 스타일의 연어 요리를 바비큐, 훈제, 스튜 등 다양한 방식으로 맛볼 수 있다.
소중한 여행을 먹다 끝내긴 억울하다면 시애틀센터로 향하자. 1962년 세계박람회 당시 사용된 건물을 개조한 종합문화공간이다. 명실상부한 랜드마크이자 도시 전망대 ‘스페이스 니들’과 미국 팝의 한 세기를 훑을 수 있는 음악 박물관 ‘모팝’ 등 다양한 볼거리, 즐길거리가 몰려 있다. 이탈리안 커피 머신 브랜드 ‘라 마르조코’가 시애틀에 낸 야심작, 카페 라 마르조코도 지역 라디오 방송국 KEXP와 함께 이 근처에 있다.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라디오 부스에서 들려주는 음악과 함께 휴식을 취하기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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