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경갑 기자 ] 교통표지판은 ‘안전 운행’을 명분으로 사람들의 행동을 통제한다. 이런 교통표지판을 그대로 재현했다면 미술이 아니다. 고속도로나 좁은 길목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익숙한 시설에 특정 기호와 색깔, 문자는 물론 거울 표면처럼 매끄럽게 처리했다. 그래서 눈에 익은 그 사물들이 문득 낯설게 다가온다. 제목이 ‘각색(Adaptations)’인 것은 그런 이유다.
세계 미술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듀오 아티스트인 덴마크 출신의 마이클 엘름그린(58)과 노르웨이 작가 잉가 드라그셋(50)은 예술처럼 보이지 않는 미술을 추구한다. 약간 이상한 느낌에서 오는 질문, 거기서 미술이 출발한다.
지난 21일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개막한 ‘엘름그린 & 드라그셋’의 개인전은 프랑스 철학자 롤랑 바르트가 설파한 ‘의미는 어떤 방식으로 이미지에 투영되고, 실제 그 의미는 유한한가’를 화두로 잡고 죽어라고 창작에 몰두한 작가의 예술적 여정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자리다. 두 사람은 이번 전시회 주제를 작품 제목에서 따온 ‘각색’으로 정하고 사회적 현상을 해학적인 시각과 미니멀리즘 방식으로 풀어낸 신작 20여 점을 펼쳐보인다.
전시에 맞춰 서울을 찾은 엘름그린과 드라그셋은 “공공장소에서 친숙하게 접하는 시각 언어가 잠재의식 속에서 연상작용을 일으키는 하나의 기표 같은 장치로 작용한다는 사실에 주목한 전시”라며 “미술은 관람객과의 관계 속에서 의미가 주어진다”고 입을 모았다.
젊은 시절 드라그셋은 연극에 빠졌다. 엘름그린은 시를 쓰며 비주얼 아티스트로 활동했다. 연극과 문학이라는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지만 사회적 관심과 권력 구조의 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자문하고 탐구하는 데 서로 공감했다. 1995년부터 함께 작업하며 과거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공간을 이용한 작품을 쏟아냈다. 작품들은 의외로 반응이 좋았다. 독일의 가장 권위 있는 미술상인 함부르크 반 호프상(2002), 베니스비엔날레 특별상(2009)을 잇달아 받아 세계적인 작가 대열에 끼었다. 2016년에는 미국 뉴욕 록펠러센터에 9m짜리 공공조형물 ‘반 고흐의 귀’를 설치해 더욱 유명해졌다. 국내에는 2015년 삼성미술관 플라토에서 열린 개인전을 통해 처음 소개됐다.
두 사람은 “개념미술을 개척한 마르셀 뒤샹 이후 미술품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작가 혼자만이 아니라 관람객과의 관계에서 이뤄진다”고 힘줘 말했다. 관람객에게 쉽게 다가가면서도 관심과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얘깃거리를 얼마나 만들어 내느냐가 관건이란 얘기다.
실제 연극무대 소품처럼 제작한 작품들은 수많은 이야기와 메타포를 뿜어내며 관람객에게 바짝 다가간다. ‘하이웨이 프린팅’ 시리즈는 대표적 산업 재료인 아스팔트를 직사각형의 캔버스 형태로 제작한 뒤 도로 표식에 쓰이는 페인트를 칠한 작업이다. 사물의 본질적 기능에 혼돈을 주면서 첨단 산업사회에서 파생되는 소속, 배제, 무력감을 담아낸 작품 ‘루프드 바(Looped Bar)’는 소외와 외로움이 넘실거린다. 입구와 출구가 없이 꽉 막힌 술집을 무대처럼 꾸몄다. 전시는 다음달 28일까지.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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