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재무정보 공개 의무화
기업들 비상
[ 이현진 기자 ] 지난해 3월 유엔은 유해화학물질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는 삼성전자 베트남 공장 근로자들의 작업 환경에 우려를 나타내는 자료를 냈다. 삼성전자는 그해 11월 열린 ‘유엔 기업과 인권 포럼’에서 베트남 생산라인을 대상으로 첫 번째 인권영향평가를 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린다 크롬용 삼성전자 노동·인권담당관은 “베트남 법인을 주요 인권 위험을 측정하고 개선책은 마련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유럽 진출 시 비재무정보 의무 공개
삼성전자가 인권을 화두로 들고나온 배경에는 이 같은 국제 사회의 정책 변화가 있다. 유럽연합(EU)이 대표적이다. EU는 지난해부터 대기업의 비재무 정보를 홈페이지 등에 의무적으로 공개하도록 했다. KOTRA에 따르면 유럽 지역 대기업 약 6000곳이 대상이다.
비재무 성과 공시 의무화는 국내 기업에도 연쇄적으로 영향을 줄 전망이다. 유럽에 공장을 보유하고 있거나 법인을 설립한 기업은 유럽 기업에 준하는 인권·노동·환경·기업투명성정책·위험관리 정보 등을 요구받기 때문이다. 현대자동차 삼성전자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들 기업은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발간해 자사가 환경·사회·지배구조(ESG)를 위해 어떤 활동을 했는지 보고해야 한다. 국제사회에서 쓰는 ESG 측정 기준은 GRI(Global Reporting Initiative)다. 기업경영활동이 환경오염에 미친 영향, 조직과 협력업체의 노동환경, 인종·성차별 여부, 조직이 지역사회에 미치는 영향, 지배구조의 독립성과 투명성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직접 진출한 기업이 아니라 수출 협력사라 해도 별반 다르지 않다. EU의 A기업이 한국 제조업체 B사의 물건을 구매한다고 가정하자. A사는 EU의 지침에 따라 협력사인 B사에 비재무적 정보를 요구한다. 원론적으로 B사는 EU의 강제력 밖이지만, A사와 협력관계를 유지하려면 인권 수준을 EU가 요구하는 만큼 높여야 한다.
“인권경영 않으면 국제경쟁력 약화”
문제는 국내 기업들이 이 같은 변화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지 여부다.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정해진 양식이나 규정 없이 자율적으로 내놓는 국내 기업이 국제 수준을 맞출 수 있겠느냐는 우려가 나온다.
유엔은 2017년 5월 한국 기업을 면담한 뒤 발표한 보고서에서 “한국 기업의 지속가능경영보고서에는 인권침해 위험을 평가하고 예방 및 구제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이 없다”며 “비재무정보 공개가 의무적인 국가의 기업과 비교해 경쟁력이 떨어질 수 있다”고 평가했다.
인권경영은 글로벌 기관투자가들의 투자 행태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지난해 1월 대한해운과 팬오션이 윤리기준 위반을 이유로 세계 1위 국부펀드인 노르웨이정부연기금의 투자대상에서 제외된 것이 대표적이다. 환경오염을 유발하고 인권침해 의혹이 있다는 이유에서다. 기업의 재무상태, 기술력, 사업성 등 외에 인권 및 환경보호 여부 등이 투자에서 고려 대상이 된 것이다.
황희석 법무부 인권국장은 “환경, 인권을 도외시하는 기업은 앞으로 다양한 경영 위험에 노출될 우려가 있다”며 “인권경영은 이런 위험에 따른 경제적 손실을 미리 막을 수 있게 하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이현진 기자 appl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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