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청와대 개입사실 인정하면서도 김은경 불구속

입력 2019-03-26 16:03   수정 2019-03-26 16:29

'심란한' 검찰, 신미숙 청와대 균형인사비서관 소환 연기




‘환경부 블랙리스트’ 의혹의 핵심 인물로 꼽히는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에 대한 구속영장이 26일 기각됐다. 법원은 김 전 장관이 받고 있는 직권남용권리행사 방해와 업무 방해 혐의에 다툼의 여지가 있다며 피고인에게 방어권을 보장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최순실 일파의 국정농단’과 대통령 탄핵으로 인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데다 문재인 정부가 공공기관 정상화를 위해 사직의사를 확인했다고 볼 여지가 있었다는 사정 등을 들었다. 청와대가 시켜서 한 일이기 때문에 정상적인 업무로 볼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오랜기간 관행적으로 해왔던 일이라는 판단도 더해졌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영장 전담 판사가 증거인멸과 도주의 우려뿐만 아니라 구속여부를 검토하는 데서 벗어나 해당 의혹 전체에 대한 법리적 판단을 통해 기각 결정을 내려 이례적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청와대 인사 등에 대한 수사를 앞두고 있는 검찰로서는 김 전 장관의 불구속으로 전략 변경이 불가피해졌다.

◆청와대 개입은 인정한 법원

서울동부지방법원 박정길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이날 검찰이 김 전 장관에 대해 청구한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검찰은 김 전 장관이 전임 정부에서 임명된 환경부 산하기관 임원들에게 사표를 내라고 종용하고 후임자로 친정부 인사를 앉히려 한 것으로 보고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업무방해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검찰은 김 전 장관이 전임 정부에서 임명된 환경부 산하기관 임원들에게 사표를 내라고 종용하고 후임자로 친정부 인사를 앉히려 한 것으로 보고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업무방해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김 전 장관은 전 정권에서 임명한 한국환경공단 상임감사 김모씨에게 사표를 내라고 요구하고, 이에 김씨가 불응하자 이른바 ‘표적 감사’를 벌여 지난해 2월 자리에서 물러나게 한 것으로 조사됐다.

아울러 김 전 장관은 김씨의 후임 상임감사를 선발하는 과정에서 언론사 출신인 친정부 인사 박모씨가 임명되도록 미리 박씨에게 자료를 제공하고, 박씨가 탈락하자 환경부 다른 산하기관이 출자한 회사 대표로 임명하도록 지시한 혐의도 받는다.

박 부장판사가 내놓은 600자가 넘는 기각 사유문에는 ‘환경부 블랙리스트’ 의혹 핵심 혐의에 대한 자체적인 3가지 판단 근거가 담겼다. 그는 △최순실 일파의 국정농단과 당시 대통령에 대한 탄핵으로 인해 공공기관에 대한 인사 및 감찰권이 적절하게 행사되지 못해 방만한 운영과 기강해이가 문제됐던 사정 △새로 조직된 정부가 해당 공공기관 운영을 정상화하기 위해 인사수요 파악 등을 목적으로 사직의사를 확인하였다고 볼 여지도 있는 점 △해당 임원에 대한 감사 결과 비위사실이 드러나기도 한 사정 등을 기각 근거로 제시했다.

그러면서 대통령 또는 관련 부처의 장을 보좌하기 위해 청와대와 관련 부처 공무원들이 (공공기관) 임원추천위원회 단계에서 후보자를 협의하거나 내정하던 관행이 법령 제정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장기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는 점을 들어 직권남용죄의 구성 요건도 부정했다.

법원이 단순히 ‘증거인멸과 도주의 우려가 없다’는 정도로 기각 사유를 내놓지 않고 해당 혐의의 구성 요건까지 부정하자 검찰로서는 당혹스런 눈치다. 검찰 관계자는 “탄핵 정국에서 공공기관 운영이 정상적이지 못했다는 사유서 내용에 근거가 없다”고 지적했다.

법조계에서도 이날 기각 사유가 이례적이라는 반응이 나온다. 한 현직 부장판사는 “최순실과 탄핵까지 언급할 필요가 있는 내용인지, 그 근거는 무엇인지 이해가지 않는다”며 “발부 또는 기각 사유를 자세히 적을 땐 검찰 또는 변호인 한 쪽의 주장을 검증없이 옮겨선 안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 판사 출신 변호사는 “공공기관 운영을 정상화하기 위해서라는 표현은 기존 공공기관이 비정상적이었다는 건데 이는 판사의 개인적 판단”이라며 “영장에 대한 기각이 아니라 판사가 아예 1심 판결을 내리려 한 것 같다”고 꼬집었다.

법원의 기각 사유가 오히려 검찰 수사가 잘됐다는 방증이라는 의견도 있다. 한 검찰 고위직 출신 변호사는 “기각 사유를 보면 청와대가 전반적으로 개입했다는 걸 인정했다”며 “검찰이 충분한 증거를 확보했다는 뜻이고 법리적 판단은 어차피 1심 재판부의 몫”이라고 설명했다.

◆靑 수사 시기 ‘저울질’

검찰은 김 전 장관에 대한 보강 수사부터 나설 계획이다. 다만 영장 재청구는 아직 고려 대상이 아닌 것으로 알려졌다. 재청구를 했다가 또 기각이 된다면 정치적 역풍을 맞을 수 있어서다. 검찰 관계자는 “기각 사유서 내용이 분명하고 자세한만큼 그 부분을 위주로 확인해서 계속 대응할 예정”이라며 “재청구는 아직 논의대상이 아니다” 고 설명했다.

이미 관련 증거가 상당수 확보된 만큼 구속을 통한 신변확보가 수사에 실질적 도움이 되진 않을 것이란 해석도 있다. 기각 사유에서도 볼 수 있듯이 ‘사실관계’보다는 ‘법리해석’에서 검찰 수사의 성패가 갈린다는 이야기다.

검찰 내부에서는 박근혜 정부 시절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에서는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 조윤선 전 정무수석 등이 모두 유죄 판결을 받았기 때문에 이번 사건에서도 1심 판결은 영장 판사의 판단과 달라질 수 있다는 기대가 나온다.

청와대 인사에 대한 수사는 일정 조정이 불가피해졌다. 당초 검찰은 김 전 장관에 대한 구속영장이 발부되면 이달 내로 신미숙 청와대 균형인사비서관에 대한 소환조사를 진행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영장이 기각되면서 영장 판사의 법리적 판단을 반박할 내용의 ‘공소줄기’를 구성할 시간이 필요하게 됐다. 때문에 신 비서관에 대한 수사는 다음달로 미뤄질 전망이다. 앞서 검찰은 김 전 장관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서에 신 비서관을 공범으로 적시했다.

고윤상/정의진 기자 ky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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