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하게 산업현장 누비는 일벌레
특유의 친화력으로 무장한 '인맥왕'
[ 김진수/김기만 기자 ]
지난 25일 오후 6시30분. 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 회장(사진)이 서울 마포에 있는 음식점 마포나룻터로 들어왔다. 정확한 시간이었다. 중기중앙회 회장에 세 번째 당선된 소감을 물었다. 뭔가 큰 포부를 밝히리라 기대했다. 그는 “이번에는 임기를 마칠 때 과거처럼 박수받으며 떠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며 “그때보다 상황이 너무 좋지 않다”고 답했다. 의외였다. 때마침 식당 주인 박은숙 사장이 음식을 들고 들어왔다. 박 사장은 오랜 단골에게 인사를 하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회장님 다시 봬서 정말 반가워요. 작년에 진짜 힘들었습니다. 나만 그런 게 아니고 장사하는 사람 대부분이 그랬어요. 제발 오래된 자리에서 장사하면서 살 수 있게 힘 좀 써주세요.”
김 회장은 평소처럼 크게 웃었다. 하지만 표정은 밝지 않았다. 이번 임기 4년이 과거 8년보다 훨씬 힘들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중소기업인과 자영업자 누구도 희망을 발견하지 못하는 현실. 김 회장은 그 무게를 느끼는 듯했다.
조직은 다양성과 방향성이 중요하다
음식이 나왔다. 마포나룻터의 주 메뉴는 양(소의 첫 번째 위)과 곱창이다. 김 회장은 여의도에서 가깝고, 양념도 좋고, 음식점에 스토리도 있어서 자주 찾는다고 했다. 마포에서 배 타고 건너 다니던 밤섬에서 태어난 사장이 수십 년째 이곳에서 고향을 보며 장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 회장은 직접 짠 레몬즙을 식탁에 올려놨다. 오래전부터 즐겨 마시는 화요에 탄산수와 얼음을 섞어 칵테일을 만들어 나눠줬다. 그만의 레시피였다. “이게 적당한 비율이 있어요. 레몬즙을 너무 많이 넣거나 하면 맛이 확 달라집니다.” 조직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다양한 사람이 토론하고 화합하고 한곳을 향해 달려갈 때 성과가 나지요.”
화합을 위해 그는 12년 전 당선됐을 때처럼 했다. 그때 회장에 당선된 뒤 상대 후보의 핵심 참모들을 중용했다. 이번에는 다른 후보를 지지한 이사장들을 부회장단에 포함시켰다. 신구(新舊) 조화도 필요하다고 했다. “처음 당선될 때 쉰둘이었고 지금은 예순넷이에요. 젊은 사람들과 함께해야죠.” 부회장과 이사진에 50대를 포진시켰다.
車·반도체뿐 아니라 책상과 전화기도 필요하다
김 회장은 지난달 28일 치러진 중기중앙회장 선거 얘기를 했다. 지인들이 “김 회장이 다시 중소기업의 위상을 높여야 한다”며 등을 떠밀었다고 했다. 선거 후 많은 사람으로부터 당선인사를 받았다. 대부분 “잘 돌아왔다”는 내용이었다고 했다. “고맙게도 중소기업인들이 열정적으로 일한 과거를 기억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2007년 23대 회장에 취임한 뒤 노란우산공제를 만들고 중소기업 전용 홈앤쇼핑과 서울 상암동 중소기업DMC센터도 설립했다.
불판에 올라온 양 몇 점을 칵테일과 함께 먹었다. 고기를 구워주던 주인은 “양은 허약한 사람에게 좋은 보양식”이라고 했다. 김 회장이 중소기업정책에 대한 얘기를 시작하려던 차였다. “기업 활동을 잘할 수 있게 해주는 환경이 중요해요. 영세한 중소기업은 좀 도와줘야 자생력이 길러집니다.” 그러려면 중앙회의 존재감이 커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지금은 더 절박하다고 했다. “제조업의 근간을 이루는 업종별 단체인 협동조합이 생존의 기로에 서 있어요. 첨단산업 시대에 자동차와 반도체도 중요하지만 책상 소파 전화기도 누군가 제조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제조의 바닥에 있는 산업을 살리기 위해 그는 “협동조합의 공동판매 행위를 인정해주는 등 중소기업이 공생할 터전을 마련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자생력 갖춰 해외로 나가야
술이 한 차례 돌고 질문이 나왔다. “회장님은 진짜 오른팔이 왼팔보다 더 깁니까.” 김 회장이 일어나더니 팔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눈으로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오른팔이 길었다. 옷도 맞춰야 할 때가 많다고 했다. 원래 그랬냐고 묻자 ‘직업병’이라고 했다. 시계업체 로만손(현 제이에스티나)을 창업한 초기 중동 국가로 출장 갈 때마다 시계 500개가량을 넣은 40㎏짜리 가방을 오른팔로 들고 다니면서 팔이 길어졌다는 얘기였다. 해외에서 먼저 성공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김 회장은 “자생력을 갖춘 기업은 적극적으로 해외로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계적으로 한류(韓流) 인기가 높은 지금 중국과 일본 같은 주변국은 물론 신(新)남방 국가들도 적극적으로 공략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최근 주변국들과 긴장관계에 있지만 정치와 경제는 구분해서 접근해야 합니다. 오히려 경제인들끼리 활발히 교류해 완충 역할을 할 수도 있어요.”
2년 뒤 ‘중소기업 전담은행’ 설립 추진
술이 몇 차례 돌았다. 차돌박이가 안주로 나왔다. 김 회장은 “이 집 고기는 다 좋다”며 얘기를 이어갔다. 중소기업이 겪는 주요 어려움 중 하나로 자금 조달을 꼽았다. 김 회장은 “국내 은행 역사에서 중소기업과 주로 거래한 은행이 망한 적은 없다”고 했다. 은행에도 중소기업은 우량 고객이라는 얘기다. 그러면서 방글라데시 그라민은행에 관심을 가져볼 만하다고 설명했다. 무함마드 유누스 교수가 돈을 빌리지 못해서 어려움을 겪는 서민을 위해 1984년 설립한 은행이다. “그라민은행은 50달러, 100달러 꿔주는데 부실률이 엄청 낮고 운영도 잘 되고 있어요. 서민과 중소기업은 금융의 A급 고객입니다.”
김 회장은 회장 선거 때 공약으로 중소기업 전담은행 설립을 내놨다. 그는 “여러 상황을 고려해 2년 뒤쯤 은행 설립에 나설 계획”이라고 말했다. 자본금 1조~1조5000억원가량이 필요한데 5000억원 정도는 중소기업 펀드를 조성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 중기중앙회 회장단 중에는 100억원을 출연하겠다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중소기업 전담은행을 세우면 중소기업들이 더 당당하게 기업 경영에만 몰두할 수 있을 겁니다.”
일자리 창출하고 가업승계도 지원해야
김 회장은 딸만 둘이다. 최근 가장 기뻤던 소식은 손녀가 인천 송도 국제학교에 입학한 것이라고 했다. 가족 간 대화를 소개하며 기업가정신이 약화되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김 회장이 최근 “(회사에 재직 중인 둘째 딸에게) 토·일요일 회사에 출근하는 걸 못 봤다”고 했더니 “주말에 왜 근무하냐”는 답변이 돌아왔다. “예나 지금이나 주말에 집에 있으면 불안하다. 요즘 젊은 경영자들은 주인의식이 약한 것 같다”며 혼을 냈다. 딸이 울먹이자 옆에서 듣고 있던 손녀가 “엄마도 나 혼내잖아”라고 말해 한바탕 웃었다고 했다.
김 회장은 4차 산업혁명을 중소기업에 접목할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가진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이나 벤처기업과 제조 중소기업의 접점(플랫폼)을 만들어 주면 시너지가 날 수 있다. 이에 착안해 우선 유망한 기업 20개가량을 발굴하면 젊은이들이 중소기업 일자리에 더 많은 관심을 둘 것 같다고 했다. 그런 취지에서 오는 5월께 ‘스마트 청년 일자리 만들기 대책’을 마련할 계획이다.
중소기업계 당면 과제 중 하나는 가업승계다. 현재 가업 영위 기간 10년 이상 중소기업 및 매출 3000억원 미만 중견기업에 최대 500억원 한도 내에서 가업승계 자산을 100% 공제해주는 가업상속공제제도가 시행되고 있다. 상속세율을 낮추는 건 ‘부의 대물림’이라는 오해를 불러올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김 회장은 “경영주가 죽고 나서 자녀들이 가업을 승계하려면 형제 간 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며 “사전에 증여하면 계획적인 가업승계가 가능하다”고 했다.
한발 앞서서 챙기고 준비해
김 회장은 당선된 뒤 이낙연 국무총리와 문희상 국회의장 등 여야 정치권에 두루 취임 인사를 다녔다. 이 총리는 만나자마자 중소기업인들과 만찬 자리를 잡자고 제안할 정도로 반가워했다. 이 총리와의 인연은 10여 년 전 일본 경제인단과의 모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국회의원이던 이 총리가 통역을 해줬다.
예전에 정동영 민주당(현 민주평화당) 국회의원과의 식사 자리에서 40여 명의 조합장 이름을 일일이 대며 소개한 적도 있다고 했다. 정 의원이 깜짝 놀라 어떻게 다 기억하냐고 물었다. 김 회장은 회의나 지방 간담회에 가기 전 자료를 꼼꼼히 챙긴다. ‘김 대리’라는 별명이 생긴 이유다. 자동차나 비행기에서 참석자 이력, 이전 주요 회의 내용과 안건도 살펴본다. “회의 전에 조금 준비하고 관련 스토리를 파악하려고 합니다. 주변 분들은 기억력이 굉장히 좋은 줄 알아요.” 김 회장은 이렇게 말하며 웃었다.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후보자에 대한 기대도 나타냈다. 국회의원 4선의 경륜이 쌓인 데다 중소기업관이 명확해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업계에 활력을 불어넣을 것이란 얘기다. “(박 후보자가) 대기업을 미워하는 게 아니라 일부 행태에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여야와 소통이 가능한 데다 중소기업 정책에도 밝아 신생 중기부가 안정되는 데 큰 역할을 할 겁니다.”
■중소기업중앙회는 360만 中企 대변인
중소기업중앙회는 360만 중소기업을 대변한다. 중기중앙회 회장을 ‘중기 대통령’ ‘중통령’ 등으로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서울 여의도에 있는 중기중앙회는 전국 900여 개 중소기업협동조합의 구심체이기도 하다. 전국경제인연합회 대한상공회의소 등과 함께 5대 경제단체로 꼽힌다. 최저임금 인상, 가업상속공제제도 등 정부의 각종 정책에 대해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의 입장과 목소리를 전달한다. 지난달 제26대 회장 선거에서 김기문 제이에스티나 회장이 당선됐다. 23·24대 회장을 거쳐 세 번째 회장직을 맡았다. 업계에서는 “김기문 회장이 돌아왔다”며 기대를 나타내고 있다.
■약력
△1955년 충북 증평 출생
△1988년 로만손 대표
△1998년 한국시계공업협동조합 이사장
△2006년 개성공단기업협회 초대 회장
△2007년 제23대 중소기업중앙회 회장
△2008년 충북대 경제학 명예박사
△2009년 국세행정위원회 위원장
△2011년 제24대 중소기업중앙회 회장
△2013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2016년 제이에스티나 회장
△2019년 제26대 중소기업중앙회 회장
■김 회장의 단골집 마포나룻터
과일소스 곁들인 양곱창…이베리코 목살도 일품
박은숙 사장은 33년째 마포나룻터를 운영하고 있다. 이 식당의 대표 메뉴는 양(150g 3만8000원) 곱창(200g 2만4000원) 생등심(150g 4만5000원) 차돌박이(150g 2만9000원) 등이다.
재료는 박 사장이 25년째 거래 중인 경북 경산의 한 농장에서 이틀에 한 번씩 보내준다. 소의 첫 번째 위인 양은 콜레스테롤이 없는 성인 음식이다. 소 한 마리를 잡으면 구이용 양은 4~5인분밖에 나오지 않는다. 씹을 때 침이 닿으면 바로 소화가 되는 게 양이다. 옛날에는 임금님에게 양으로 만두를 빚어 진상했다고 한다. 곱창은 소의 창자다.
박 사장은 “1주일에 한 번 정도 곱창을 먹으면 정력에도 좋다”며 웃었다. 직장인을 위한 합리적인 가격대의 이베리코 목살(180g 1만5000원)도 인기라고 한다.
이 식당은 모든 메뉴에 제각기 다른 소스를 사용한다. 양 소스는 사과가 70% 들어가 있다. 등심 소스는 간장에 파인애플 양파 등을 넣고 끓인 육수에 겨자와 마늘을 풀어서 만든다. 고기의 느끼한 맛을 없애준다.
식사로는 굴비정식(3만5000원) 간장게장(3만원) 옛날불고기(1만1000원·점심 메뉴) 양곰탕(9000원) 갈비탕(9000원) 등이 있다. 개업 때부터 지금까지 유지한 메뉴는 우거지탕(7000원)이다. 정·재계 유명인이 많이 찾는 음식점으로 알려져 있다.
김진수/김기만 기자 tru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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