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거래·연인관계 빙자해 접근
경찰 "피해액 100억대 추정"
[ 이현진 기자 ] 50대 김모씨는 지난해 4월 메신저를 통해 자신을 미군이라고 하는 한 남성을 알게 됐다. 두 사람은 시시때때로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친분을 쌓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남성은 “아내와 아이들이 교통사고로 죽어 당신과 함께 살고 싶다”며 “포상금과 재산을 한국으로 부칠 테니 운송료를 보내달라”고 말했다. 김씨가 두 달간 이 남성에게 보낸 돈은 약 4억3000만원. 돈을 받은 미군은 잠적했다.
서울지방경찰청 외사과는 이른바 ‘로맨스 스캠’ 등의 수법으로 김씨 등 23명에게 약 14억원을 뜯어낸 혐의로 국제사기조직 ‘스캠네트워크(Scam Network)’의 한국지부장 A씨(나이지리아인·40)와 한국인 B씨(64) 등 조직원 7명을 구속했다고 2일 발표했다. 이들은 나이지리아와 가나 등 서아프리카에 본부를 두고 한국·중국·홍콩·인도 등에서 범행을 저질렀다.
범행 수법은 전형적인 스캠(감정 사기) 방식이다. 먼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메신저를 이용해 무작위로 피해자들에게 접근한 뒤 자신을 ‘시리아에서 포상금을 얻은 미군’ ‘거액을 상속받은 미국 외교관’이라고 사칭해 환심을 샀다. 짧게는 2주, 길게는 1년 동안 공을 들였다. 이후 “금이나 현금을 보낼 테니 통관비를 보내달라” “미국 외교관인데 자금세탁방지 증명서 발급 비용을 빌려달라”는 등의 요구로 거액을 가로챘다. 숨겨진 피해를 고려하면 실제 피해 액수는 100억원대에 달할 것으로 경찰은 추정했다.
피의자들은 돈을 뜯어낸 뒤 잠적해 가나와 나이지리아 등으로 수익금의 일부를 보내고, 나머지는 한국에서 생활비 및 명품을 사들이는 데 썼다. 해외로 빼돌린 범죄수익금 중 일부를 다시 한국으로 들여와 돈세탁한 뒤 중고차 등을 구입해 아프리카로 수출하기도 했다.
이들은 입국이 비교적 자유롭다는 점을 노려 한국을 범행지로 선택했다. 라이베리아 국민은 국내에 90일간 무비자 입국이 가능하다. 나이지리아·가나·토고인은 수십달러만 내면 라이베리아 위조여권을 발급받을 수 있다.
경찰은 “인터폴에 공조를 요청해 한국에서 활동해온 나머지 조직원 9명과 나이지리아 스캠네트워크 본부 총책 등을 붙잡을 것”이라며 “심리적으로 외로운 중·장년층은 스캠 수법에 속기 쉬워 외국인에게 송금할 때는 특히 신중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현진 기자 appl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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