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건설사 2곳 '각축'
"이사비 2000만원 무이자 대여" 제시…불법 논란
조합 "이사비 빼라" 요구…구청도 '행정지침' 내려
[ 이정선 기자 ] “이사비 2000만원 무이자 대여합니다.”
재개발 시공사 수주전에서 ‘이사비’가 또다시 등장했다. 재개발·재건축 수주전이 진흙탕 싸움으로 변질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정부가 금지했지만 건설회사들이 슬그머니 이사비 카드를 다시 꺼내고 있다. 일감이 부족한 상황이어서 정부 차원의 처벌 규정이 강화되지 않는 한 ‘이사비’를 둘러싼 분쟁이 계속 이어질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슬그머니 고개 드는 이사비의 유혹
총 공사비가 약 3300억원에 이르는 장위뉴타운 내 장위6구역 수주를 위해 뒤늦게 뛰어든 L건설은 ‘가구당 이사비 2000만원 무이자 대여’ 조건을 내걸었다. 조합은 지난 1월 27일 시공사 선정을 위해 1차 경쟁 입찰을 시행했으나 D건설만 참여해 유찰됐다. 이후 지난달 25일 2차 입찰에 D건설과 L건설이 참여했다. 조합은 오는 28일 주민총회를 열어 두 건설사를 대상으로 한 조합원 투표를 해 시공사를 선정할 계획이다. 시공사 선정까지 채 한 달이 남지 않은 상황에서 후발주자인 L건설이 이사비를 제시하면서 수주전은 한층 가열되는 양상이다. L건설 측은 ‘가구당 이사비 2000만원 무이자 대여’라는 문구를 적은 홍보전단까지 배포했다. 이 같은 행위는 지난해 2월 국토교통부에서 고시한 ‘정비사업 계약업무 처리기준’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제30조에 따르면 ‘건설업자 등의 입찰서에 이사비, 이주비, 이주촉진비 등 시공과 관련이 없는 사항에 대한 금전이나 재산상 이익을 제공하는 제안을 할 수 없다’고 돼 있다.
이사비는 말 그대로 이사에 필요한 각종 경비다. 새 기준 시행 이전엔 건설사가 무상 또는 대여 형태로 제공했다. 이주비는 조합원의 주택 등을 담보로 금융회사에서 빌리는 돈이다. 조합원들이 직접 이주비를 조달할 수 있지만, 건설사가 대신 빌려주는 건 불법이다. 이주 촉진비는 사업을 빨리 진행하기 위해 이주비 외에 별도의 비용을 추가로 무상 또는 대여 형태로 제공하는 금액이다. 조합이 아니라 건설사가 제공하는 건 역시 불법이다.
장위6구역 조합 관계자는 “입찰제안서에서 이사비 항목을 빼라고 L건설에 요구했다”고 말했다. 성북구청도 지난 3일 조합과 L건설 D건설 등에 ‘이사비 제안을 하지 말라’는 내용의 행정지침을 내렸다.
장위6구역은 10만5000여㎡ 규모다. 재개발 사업을 통해 기존 노후주택(1556가구)을 모두 허물고 1637가구의 아파트 단지를 지을 예정이다. 시공사가 확정되면 9월부터 이주를 시작해 내년 10월에 착공할 계획이다.
대출 규제 강화도 한 원인
이사비 논란이 불거진 건 2017년 9월 서울 서초구 반포주공1단지(1·2·4주구) 재건축 수주전이 벌어지면서다. 당시 GS건설과 맞붙었던 현대건설이 ‘무상 이사비 7000만원’이라는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하면서 “금품을 제공해 시공권을 따내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됐다. 국토부는 정비사업 계약업무 처리기준을 마련해 건설사의 이사비 제안을 금지했다.
그러나 지난해 5월 부산 연산5구역 수주전에서 이수건설이 기존 이주비 70% 무이자 대출지원 등을 제안했다가 입찰참가 자격을 박탈당했다. 같은 달 서울 동작구 흑석9구역 시공사 선정 과정에서도 L건설이 ‘개발이익 보증금’이란 명목으로 조합원 가구당 3000만원씩 지급한다고 제시해 논란이 일었다.
이사비 논란이 끊이지 않은 이유는 정부의 대출 규제와도 무관치 않다는 것이 정비업계의 지적이다. 2017년 ‘8·2 부동산 대책’ 이후 서울 등 투기지역에서 주택담보비율(LTV)이 40%로 줄어들면서 이주비 마련에 어려움을 겪는 조합원이 늘어났다. 한 대형 건설사 관계자는 “종전자산 평가금액이 낮은 집을 보유한 재개발 조합원들은 살고 있는 주택을 담보로 이사비를 빌리기가 쉽지 않다”며 “불법인지 알면서도 일부 건설사가 이주비나 이사비를 제안하는 건 수주전의 당락을 가를 만한 변수인 걸 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국토부 “현장점검 통해 적극 단속”
전문가들은 건설사들이 이주비나 이사비 등을 제안해도 이렇다 할 처벌규정이 없어 규제의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정비업계 관계자는 “금지 규정만 있을 뿐 처벌 규정이 명확하지 않아 실효성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현재 금지된 이사비나 이주비, 이주촉진비 등의 명칭을 피해 비슷한 이름의 ‘변종 이사비’ 명목으로 자금을 편법 지원하는 사례가 등장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한 대형사 관계자는 “오는 10월 시공사를 뽑는 한남3구역 등 알짜 사업장에서 이사비 분쟁이 재연될 공산이 크다”고 내다봤다. 국토부 주택정비과 관계자는 “처벌 규정을 법에 세세하게 마련하는 건 한계가 있다”면서도 “이사비 등 과열 조짐이 벌어지면 현장 점검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단속에 나설 방침”이라고 강조했다.
이정선 기자 leewa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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