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는 평양 천도 후 지방에 중앙관료 파견…신라는 150년 늦은 6세기 이후 국가단계로 진입

입력 2019-04-08 09:01  

이영훈 교수의 한국경제史 3000년 (8) 국가의 성립 (하)


427년 고구려는 평양으로 천도했다. 475년 고구려는 백제를 공격해 한성(지금의 서울)을 함락하고 백제왕을 참수했다. 멸망의 위기에 처한 백제는 웅진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이후 백제는 왜병의 호위를 받으며 귀국한 동성왕(東城王)에 의해 재건됐다. 백제는 남조의 제(齊)에 빈번하게 사신을 파견했으며 양(梁)으로부터 불교·미술·서예·건축 방면의 선진 문물을 광범하게 수용했다.

5세기 후반 고령, 합천 등 영남 서남부를 무대로 대가야(大伽倻)가 흥기했다. 그 새로운 연맹체는 호남 동부의 섬진강 유역으로, 나아가 호남 서부의 영산강 유역으로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5세기 후반과 6세기 전반에 걸쳐 영산강 유역에서는 왜의 고유한 묘제인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 축조됐다. 전방후원분은 이 지역과 왜의 긴밀한 관계를 상징한다. 지금까지 확인된 전방후원분 유적은 모두 14기다. 6세기 중반 영산강 유역은 백제의 영역으로 편입됐으며, 그와 더불어 전방후원분의 축조도 중단됐다.

로마의 금세공품과 유리공예품

중국인의 관찰에 의하면 2~3세기 한국인은 금과 은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다. 금은이 부장품으로 출토되는 것은 4세기 이후 신라의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에서다. 4세기 중엽 신라는 조령과 죽령을 넘어 한강 상류로 이어지는 교역로를 개척했다. 4세기 말에는 고구려의 도움을 받아 낙동강 하류역으로 진출했다. 이후 신라가 벌인 대외교역 범위와 내용에는 현대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바가 있었다. 4~6세기 신라의 거대 왕릉에서 발굴된 화려한 금세공품과 유리공예품은 광대한 유라시아 대륙의 초원을 건너온 로마 제품이거나 대륙을 건너온 장인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부(部)체제

고구려의 국읍은 5부(部)로, 신라의 국읍은 6부로 이뤄졌다. 각 부는 독자의 읍락으로서 족장사회였다. 고구려와 신라는 부의 연맹체로 발족했다. 백제도 마찬가지다. 각 부는 대외적인 외교·군사·무역 업무를 연맹체의 수장에 위임했지만, 상당한 자치권을 보유했다. 예컨대 고구려의 각 부는 독자의 종묘, 조상신, 토지신에 제사를 지냈으며 독자 관원과 병력을 보유했다.

5세기까지 신라의 왕은 6부의 지배세력 간지(干支)들이 모인 귀족회의의 장로와 같은 존재였다. 삼국이 여러 국을 병합하거나 복속시키는 과정도 비슷했다. 백제와 신라는 그에 복속한 국을 후국(侯國)으로 봉하고 자치를 인정했다. 백제와 신라는 후국의 왕에게 금동제 관이나 신발을 위신재로 하사해 권위를 부여하는 한편, 공납이나 병력 동원을 강요했다. 역사학자들은 이 같은 초창기의 국가체제가 족장사회로부터 물려받은 특질을 가리켜 부체제(部體制)라 이름하고 있다.

율령의 반포와 중앙관제의 정비

372년 고구려는 불교를 수용하고 태학을 설립했다. 373년에는 율령을 반포했다. 평양으로 천도한 뒤에는 지방을 군과 현으로 구분하고 중앙관료를 파견했다. 중앙관료는 14등으로 그 신분과 위계가 정비됐다. 신라는 고구려보다 거의 150년이나 늦게 국가 단계로 진입했다. 503년 신라는 이사금(尼師今), 마립간(麻立干) 등으로 불러온 연맹체의 수장을 왕(王)으로 칭하기 시작했지만, 형식적인 변화에 불과했다. 503년과 524년에 세워진 영일냉수리비와 울진봉평비에 의하면 서로 다른 부 출신의 왕 2~7명이 공동으로 재판을 하거나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신라의 왕이 단독으로 교령을 내리는 것은 6세기 중반의 일이다. 550년에 세워진 단양적성비에서 그 같은 변화를 관찰할 수 있다.

그 사이 신라는 중앙관제를 17등으로 정비하는 율령을 반포하고, 6부의 관원을 통일적인 중앙관제로 포섭했다. 또 기존의 읍락을 촌으로 재편한 뒤 촌주(村主)를 임명하고, 주요 거점에 중앙군과 함께 군주(軍主)를 파견했다. 560년에 세워진 순수비(巡狩碑)에는 신라의 강역에 자신의 덕화가 두루 미친다는 진흥왕(眞興王)의 자부심이 새겨져 있다. 이 단계에 이르러 신라는 국가 단계로의 진입을 완료했다.

■기억해주세요

4~6세기 신라의 거대 왕릉에서 발굴된 화려한 금세공품과 유리공예품은 광대한 유라시아 대륙의 초원을 건너온 로마 제품이거나 대륙을 건너온 장인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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