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정진 기자 ] “여행은 한평생 살아가는 동안 겪는 경험 가운데 가장 강렬합니다. 일상을 압축해 놨기 때문이죠. 이런 중요했던 경험을 언어화하는 게 바로 작가의 역할이기에 오래전부터 여행을 문학적 언어로 풀어내고 싶었습니다.”
소설가 김영하(51·사진)는 17일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산문집 《여행의 이유》(문학동네)를 내놓은 이유에 대해 이같이 설명했다. 《여행의 이유》는 2015년 내놓은 산문 시리즈 《보다》 《말하다》 《읽다》 이후 4년 만에 낸 그의 신작 산문이다. 김 작가가 처음 여행을 떠난 순간부터 최근까지 오랜 시간 여행하면서 느낀 생각들을 아홉 가지 이야기로 풀어냈다. 여행지에서 겪은 평범한 경험담이라기보다는 여행을 통해 느낀 사유의 정리에 가깝다. 그는 “오래전부터 여행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는데 10년 새 세상과 여행을 바라보는 제 시각이 변해왔다는 걸 느꼈다”며 “최근에서야 여행을 소재로 인간과 글쓰기, 타자와의 관계, 인생의 의미 등 50년 인생을 관통하는 이야기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김 작가의 인생은 ‘유랑’과 ‘여행’으로 요약된다. 군인 아버지를 따라 어린 시절 잦은 이사를 겪으면서 그는 ‘떠남’을 일상의 한 부분으로 여기며 살아왔다. 이후 작품 집필, 연수 등을 이유로 아내와 미국 뉴욕, 이탈리아, 과테말라와 멕시코 등 여러 나라에서 짧게 머무르며 겪은 크고 작은 경험들은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 《검은 꽃》 등의 바탕이 됐다. 여행을 통해 그는 어떤 문학적 영감을 얻을까. “특별한 영감과 소재를 얻으려는 목적을 갖고 떠나는 게 아닙니다. 그저 백지상태로 떠나 많은 것을 흡수해 돌아옵니다. 현실을 놓고 여행을 떠나면 오직 지금과 제 주변에 일어나는 감각에만 집중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들이 평상시보다 기억에 많이 남아 자연스럽게 글감이 되는 것 같습니다.”
산문집은 소설 집필을 위해 중국 상하이로 떠났지만 미리 비자를 받아두지 않아 강제 추방당한 경험담으로 시작한다. 그는 “소설과 영화가 현실과 다른 점은 시작과 동시에 시련이 닥친다는 것”이라며 “여행도 하나의 이야기로 본다면 가장 큰 봉변과 시련을 겪은 게 가장 재미있을 것 같았다”고 했다. 이어 “여행과 소설 모두 주인공이 뜻밖의 경험을 통해 시련과 좌절을 겪어도 본질적으로 그 안에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의미 있는 깨달음을 준다”고 덧붙였다.
여행 예능 TV 프로그램인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알쓸신잡)’에 출연하면서 느꼈던 생각도 책에 담았다. 그는 “그동안 내 시점에서만 여행을 지켜보고 여행지에서의 기억 역시 주관적 기준으로 편집하는 등 내 여행은 항상 1인칭이었다”며 “방송을 통해 타인이 내 여행을 촬영하고 편집해 전혀 다른 결과물을 만드는 과정을 겪으면서 진짜 여행은 직접적 경험과 간접적 경험이 합쳐져야 비로소 완성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김 작가는 아홉 가지 이야기 중에 ‘노바디의 여행’에 유독 많은 분량을 할애했다. 그는 “내가 누구인지 약간 아는 단계인 ‘섬바디(somebody)’의 모습으로는 나를 바꾸기 어렵지만 여행은 내가 누구인지 희미해지도록 만들어 그 속에서 나를 되돌아보게 하는 ‘노바디(nobody)’ 상태로 돌려놓는다”고 했다. “일상에서의 내 모습은 본연의 내가 아닐 수도 있어요. 여행은 나를 백지상태로 만들고 가벼운 시련을 부여하죠. 내가 얼마나 강하고 약하며, 어떤 걸 견디고 못 견디는지 확실하게 알게 해줍니다.”
김 작가는 독자들에게 사진으로만 남기고 오는 여행 대신 이제부터라도 ‘글로 써보는 여행’을 해보라고 조언했다. “여행은 우리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삶과 정신에 강력한 영향을 미칩니다. 과거를 기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쓰는 거예요. 그때 그순간 느낀 감정이나 경험을 말로 녹음해본다든가 글로 써본다면 여행이 나에게 무엇이었는지 분명히 알게 될 겁니다.”
글=은정진/사진=김영우 기자 silve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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