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도 신고없이 30일 걸 수 있어
[ 김순신/박진우/이주현/강현우 기자 ]
서울 거리에 현수막이 넘쳐나고 있다. 외국인 관광객이 많은 잠실 롯데월드타워 앞에는 2년째 대형 현수막이 거리를 덮고 있다. 외국어까지 동원해 롯데를 거칠게 비난하는 문구를 써놓아 외국인조차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광화문 종로 등 대로변은 물론 시청 법원 경찰청 국세청 등 주요 기관과 대기업 본사 앞에는 어김없이 대형 현수막이 걸려 있다.
서울에 현수막이 많은 것은 별다른 규제 없이 효과적으로 주장을 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옥외광고물법에 따르면 집회 관련 현수막은 별도의 신고·허가 없이도 30일간 내걸 수 있다. 한 달꼴로 집회 신고를 하면 무기한 내걸 수 있다는 얘기다. 크기도 내용도 자유다. 그러다 보니 문구는 자극적이다. 욕설과 속어가 난무하고 일부 표현은 모욕적이고 섬뜩하기까지 하다. 살해 위협을 하는 문구도 있다.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열린 집회 및 시위는 전년보다 58.2% 증가한 6만8315건이었다. 경찰 관계자는 “한 집회에서 5개의 현수막만 써도 30만 개가량의 현수막이 걸리는 셈”이라며 “집회 후에도 대부분 현수막을 걸어놓는다”고 말했다. 불법 현수막도 적지 않다. 집회가 끝난 뒤 1개월 이상 방치하거나 무단으로 내건 현수막이다. 서울시가 지난해 수거한 불법 현수막은 50만9525개다.
서울시 관계자는 “각 구청에서 불법 현수막을 수거하는 인원은 모두 80명가량에 불과하다”며 “불법 현수막을 신속하게 수거하기는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시민들도 불편을 호소하고 있다. 직장인 한모씨(32)는 “종각역 앞에서 횡단보도를 가로질러 설치된 현수막 줄에 걸려 넘어진 적이 있다”며 “표현의 자유도 좋지만 시민 불편을 초래하고 혐오감을 주는 현수막을 그대로 두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잠실 123층 랜드마크 앞 도배한 '기업 비방 현수막'…2년째 손도 못 대
18일 서울 신천동의 국내 최고층 빌딩 롯데월드타워 앞. 대로변 가로등과 겹겹이 연결된 줄들이 6~10m 높이에서 길이 8m짜리 현수막 7개를 지탱하고 있었다. 한국어뿐 아니라 영어, 일본어까지 롯데를 고발하는 내용의 붉은색 문구가 담긴 노란색 현수막들은 바람에 현란하게 펄럭였다. 롯데그룹 협력사 대표들로 구성된 롯데피해자연합회가 벌이는 시위 현장이다. 이들은 대로에 ‘롯데의 갑질을 고발한다’는 현수막으로 도배한 버스도 세워놨다.
서울의 랜드마크로 통하는 이곳에서 2년째 벌어지고 있는 풍경이다. 면세점 쇼핑을 온 일본인 하나타 스즈키(25)는 “시내 한복판에서 이런 광경을 보는 게 썩 유쾌하지는 않다”며 “일본에선 찾아보기 어려운 광경”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송파구청 담당자는 “마음대로 뗄 수 없다”고 난색을 표했다. 구청이 철거할 수 있는 ‘불법’ 현수막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기업 본사 앞은 연중 집회장
현행 옥외광고물법에 따르면 지방자치단체에서 지정하는 장소가 아닌 곳에 내건 현수막은 ‘경찰에 신고된 집회 장소’를 제외하고 모두 불법이다. 현수막들이 도시 미관을 해치고 시민들의 안전사고를 유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찰에 신고된 집회장소’만 놓고 보면 상황은 달라진다. 옥외광고물법은 ‘집회 관련 현수막은 별도의 신고·허가 없이도 설치일로부터 30일간 내걸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현수막의 크기 및 내용에 제한도 없다. 서울 시내 곳곳이 시위용 현수막으로 도배될 수 있는 이유다.
서울 도심인 광화문광장으로 이어진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출입구에는 이날 장애등급제의 단계적 폐지에 반대하는 시민단체 현수막이 늘어서 있었다. 길이가 10m에 달해 지하철역 출입구를 3분의 2 이상 가렸다. 이 현수막을 건 시민단체 측은 서울시와 조율했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직장인 박모씨(29)는 “지하철 역을 출입할 때 불편한 것은 둘째치고 줄 한쪽이 끊어져 지하철 입구에서 날리는 현수막이 위험천만하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국세청과 보신각, 경찰청 앞에서는 좀 더 자극적인 문구의 현수막을 볼 수 있다. 특정인을 지칭하면서 ‘도둑놈들’ ‘썩은 떡값’ ‘하이에나처럼 썩은 고기만을 찾아 수사한다’ 등의 내용이다.
현수막은 기업에도 공포의 대상이다. 대기업 본사 앞은 노동조합, 협력업체, 시민단체들의 점거대상이 된 지 오래다. 서울 여의도동 LG그룹 본사(LG트윈타워) 앞에는 하청업체들의 현수막이 1년 내내 걸려 있다. 서초동 삼성그룹 사옥 앞에도 주요 계열사의 해직 근로자들이 현수막을 내걸고 집회를 주도하고 있다. 양재동 현대자동차그룹 사옥 앞에선 금속노조 유성기업지회가 3년째 천막 농성을 벌이고 있다. 한 직원은 “수년째 회사를 비방하는 글을 보면서 출근하니 스트레스가 적지 않다”고 하소연했다.
비난 및 고발내용이 가득한 현수막은 주택가에도 있다. 한화그룹에 인수된 삼성테크윈의 노조원들은 지난 2월 11일 등 두 차례에 걸쳐 서울 가회동의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집 앞에서 집회를 열었다. 김 회장을 조롱하는 듯한 문구가 적힌 현수막이 동원됐다. 이 현수막들은 지금도 김 회장 자택 앞에 걸려 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이미 시시비비가 가려진 문제인데도 현수막을 통해 일방적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려 한다”며 “반기업 정서를 부추기고 국가 이미지에도 악영향을 주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모욕·명예훼손 당해도 속수무책
현수막 문구가 사실과 다르거나 모욕적이어도 대처하기는 쉽지 않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은 2010년 한 대기업 협력업체 노동조합이 대기업 회장을 영화 배트맨의 악당인 ‘조커’로 묘사한 현수막이 명예훼손에 해당한다며 제거하라고 명령한 바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업과 정부기관들은 법적으로 해결할 경우 노조 및 시민단체를 상대로 ‘갑질’한다는 비난을 받을까봐 이를 꺼린다. 재계 관계자는 “모욕적인 표현과 비방 때문에 명예훼손이나 모욕죄로 고소하더라도 오히려 문제를 더 키우는 사례가 많아 아예 대응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민규 법무법인 은율 변호사는 “집회및 표현의 자유는 존중해야 하지만 특정인을 비방하는 방식으로 하면 모욕 또는 명예훼손죄에 해당될 수 있다”면서도 “상대방이 소송하더라도 받을 수 있는 위자료가 적어 대응하지 않는다는 점을 이용해 과격한 표현을 서슴없이 쓰는 사례가 많다”고 설명했다.
김순신/박진우/이주현/강현우 기자 soonsin2@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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