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막걸리는 국내 주류시장에서 '나홀로' 호황을 누렸다. 일본에서 막걸리는 '맛코리'라는 이름으로 여성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국내에서는 '웰빙 열풍'에 상대적으로 값이 싸고 아미노산과 유산균이 풍부한 막걸리를 많이 찾았기 때문이다. 주류업계에선 "30년 만의 막걸리 호황"이라는 얘기까지 나왔다.
그러나 이 같은 호황은 장수막걸리나 국순당 같은 대형 막걸리 제조업체의 얘기였다. 2010년 지역 막걸리 업체인 지평주조(지평생쌀막걸리)는 연매출 2억원으로 고사(枯死) 직전의 상태였다. 지역 막걸리 업체들은 젊은 소비자층이 유입되지 못하면서 주류시장에서 외면 받았고, 지평주조도 지역사회 판매에만 기댄채 위축되고 있었다.
그렇게 위기에 처했던 지평막걸리가 반전 스토리를 써나가고 있다. 27일 지평주조에 따르면 지평막걸리는 지난해 166억원의 매출액을 거뒀다. 양조장 문을 닫아야 할 위기에까지 처했던 8년 전에 비하면 매출액이 80배 이상 뛴 것이다. 전통주전문점협의회에 따르면 지평막걸리는 지난해 가장 많이 팔린 막걸리 2위에 올랐다. 기존에 있던 양조장만으로는 수요를 감당하지 못해 지난해 6월 제2공장도 지었다.
반전의 시작은 2010년이었다. 고령이었던 할아버지(김교십 씨)와 아버지(김동교 씨)의 뒤를 이어 김기환 지평주조 대표가 경영을 맡으면서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그의 나이 불과 28세였다. 김 대표는 부임하자마자 '막걸리=노년층 술'이라는 공식을 깨야 새로운 수요를 창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막걸리 성지(聖地)로 꼽히는 종로의 광장시장 대신 강남, 홍대, 신촌 등 젊은이들이 몰리는 상권을 돌며 공격적으로 마케팅을 시작했다.
반응이 바로 온 건 아니었다. 20~30대 젊은층에게 막걸리는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그나마 막걸리를 마시는 젊은층도 인지도가 높은 장수막걸리나 국순당 제품을 집어들었다. 김 대표는 젊은 소비층을 공략하기 위해 2015년 도수를 1도 낮춘 5도 막걸리를 내놨다. 시장 점유율 1위인 장수막걸리가 6도인 상황에서 도수를 낮춘다는 것은 모험이었다. 알코올 도수 6도는 기존 막걸리 시장의 주요 소비층인 고령층이 오랜 기간 마셔온 익숙한 맛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 대표는 젊은층에 어필하기 위해서는 '부드럽고 순한 맛'이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반응이 서서히 오기 시작했다. 도수를 낮춘 뒤 반년이 지나자 '부드럽고 숙취 없는 막걸리'로 젊은층 사이에서 입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지평주조 관계자는 "2030 젊은 세대들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지평주조 막걸리 사진을 올리면서 소비자층이 확대되기 시작했다"며 "기존 막걸리보다 부드럽고 도수도 낮은 것이 좋은 반응을 이끌어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2017년 대형마트에 입점하면서 외형을 크게 키웠다. '부드럽고 숙취 없는 막걸리'로 소비자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는데 성공한 것이 대형마트 상품기획자(MD) 눈에 들어왔다. 이 때문에 기존 양평에 있는 양조장만으로는 수요를 감당하지 못해 지난해 6월 춘천에 월 500만병(750mL 기준)을 생산할 수 있는 제2공장을 지었다.
부드럽고 순한 맛과 함께 지평막걸리의 인기를 뒷받침하는 건 '묵직한 맛'이다. 전통적으로 우리나라는 막걸리를 만들 때 밀로 누룩을 빚었다. 일본의 경우 쌀로 누룩을 빚는다.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 대부분의 막걸리 제조업체는 쌀 입국(粒麴·쌀에 한가지 누룩곰팡이만 인위적으로 번식시킨 것) 방식을 쓴다. 지평주조는 쌀 대신 밀 입국을 사용해 전통적인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밀 누룩을 사용했을 경우 향긋한 향이 더 강하고 묵직한 맛을 내는데 유리하다고 알려져 있다. 또 자체 단백질 함량이 높아 더 고소하고 깊은 맛이 난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 대표가 전통적인 방식을 고수하는 건 지평주조의 역사 때문이다. 1925년에 설립된 지평양조장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양조장 중 한 곳으로, 한국전쟁 지평리 전투 당시 UN군 사령부로 사용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1대 사장인 이종환 씨가 설립한 뒤 1960년 김 대표의 조부인 김교십 사장이 인수했다. 김 대표는 "막걸리 기본에 충실해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것"이라고 말했다.
노정동 한경닷컴 기자 dong2@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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