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비아숫자를 대하는 우리 인식 밑바닥에는 '일(1)'과 '하나'가
늘 세력 다툼을 하고 있다. 가령 '3분기'는 '삼분기'로 읽지만
'3곳'은 '삼 곳'이라 하지 않는다. '세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 표기도 '3곳'이 아니라 '세 곳'으로 적는 게 좋다.
[ 홍성호 기자 ]
우리가 흔히 쓰는 1, 2, 3 등 아라비아숫자가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게 언제쯤일까? 아래 예문을 토대로 추정하면 대략 100년이 채 안 될 것 같다. 일제강점기하에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펼친 문자보급운동이 계기가 됐다.
① 다음 숫자를 차례차례 한 자씩 쓰고 읽는 법을 가르칠 것. 一 1, 二 2, 三 3 …. (조선일보사 <문자보급교재> 1936년)
② 필산숫자: 1(一), 2(二), 3(三) …. 한문숫자: 일 一 (하나), 이 二 (둘), 삼 三 (셋) …. (동아일보사 <일용계수법> 1933년)
100년 전 ‘1, 2, 3’을 ‘일, 이, 삼’으로 가르쳐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숫자를 읽는 방식이다. 아라비아숫자 1, 2, 3을 나열한 뒤 이를 읽고 쓰는 법을 한자 ‘일(一), 이(二), 삼(三)…’으로 가르쳤음을 알 수 있다. 우리말 수사에는 두 가지가 있다. 수량을 셀 때 쓰는 말을 ‘기수(基數)’라 하고, 사물의 순서를 나타낼 때 쓰는 것을 ‘서수(序數)’라고 한다. 일, 이, 삼(한자어 계열) 또는 하나, 둘, 셋(고유어 계열) 등이 기수다.(서수는 한자어로 제일, 제이, 제삼..., 고유어로 첫째, 둘째, 셋째 식으로 한다.)
아라비아숫자는 수사가 아니라 수를 나타내는 여러 부호 중 하나일 뿐이다. 그것을 어떤 식으로 읽을지는 나라마다 다르다. 한국에선 일, 이, 삼(한자어) 또는 하나, 둘, 셋(고유어)으로 읽고 영어로는 원, 투, 스리다. 일어에서는 이치, 니, 산이며 중국에선 이, 얼, 싼이다. 한국인이 1, 2, 3을 보고 유독 일, 이, 삼, 즉 한자음으로 읽는 까닭은 100여 년 전 문자 보급 당시 그리 배웠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부터 ‘일~십’을 소리는 한자음으로 익히고 뜻은 고유어 ‘하나~열’로 새겼다. 11, 12를 십일, 십이로 읽든 열하나, 열둘로 읽든 마찬가지라는 얘기다. 하지만 실제로는 여간해서 고유어로 읽지 않는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아라비아숫자에 대해 갖고 있는 인식체계다. 김창섭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숫자 3을 써놓고 삼으로만 읽을 게 아니라 셋으로도 읽을 수 있어야 한다”며 “고유어 수사에 대한 인식을 더 키워야 한다”고 말했다.
고유어는 고유어끼리, 한자어는 한자어끼리 어울려
역사적 경험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라비아숫자를 대하는 우리 인식 밑바닥에는 ‘일(1)’과 ‘하나’가 늘 세력 다툼을 하고 있다. 가령 ‘3분기’는 ‘삼분기’로 읽지만 ‘3곳’은 ‘삼 곳’이라 하지 않는다. ‘세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 표기도 ‘3곳’이 아니라 ‘세 곳’으로 적는 게 좋다. 그래야 자연스럽다. 공통점은 일반적으로 고유어는 고유어끼리, 한자어는 한자어끼리 어울린다는 점이다. 고유어 수사와 한자어 수사가 선택되는 환경의 차이에서 오는 결과다.
하지만 실제 글쓰기에선 왕왕 이를 무시한다. ‘4달, 5가지, 6살, 7군데’ 같은 게 어색함을 주는 까닭도 그런 때문이다. 우리의 학습경험은 4, 5, 6, 7을 사, 오, 육, 칠로 인식한다. 그렇다고 이들을 ‘사 달, 오 가지, 육 살, 칠 군데’로 읽을 사람은 없다. 누구나 ‘네 달, 다섯 가지, 여섯 살, 일곱 군데’로 읽는다. 그러다 보니 시각적 인식과 실제 읽는 방식 간의 괴리로 인해 거부감이 생긴다. 따라서 이런 경우 아라비아숫자 대신 고유어 숫자로 통일해 적는 게 좋다. 가령 나이를 쓸 때 ‘20살’보다는 ‘스무 살’ 또는 한자어로 ‘20세’라고 하는 게 자연스러운 표기다.
한자어 수사와 고유어 수사를 뒤섞어 쓴 여파는 의외로 길고도 깊다. 다음 호에서 이에 관해 자세히 살펴본다.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