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김흥식 前 장성군수가 시작
이낙연 국무총리·조정래 작가
박승 前 한은 총재·임권택 감독…
거쳐간 강사만 1000여명
[ 임동률 기자 ] 지난 2일 전남 장성문화예술회관 소극장. 오후 4시가 다가오자 200석의 객석은 주민과 공무원으로 가득 찼다. 머리가 희끗한 70대 넘는 노인도 적지 않았다. 이태억 KAIST 산업시스템공학과 교수가 ‘4차 산업 이후 미래에는 어떤 일을 하게 될까요’를 주제로 강연을 시작했다. 청중은 익숙한 자세로 수첩에 그의 말을 받아적었다. 유두석 장성군수도 객석 맨 앞줄에서 메모장을 꺼내들었다. 장성군이 운영하는 교육 프로그램 ‘21세기 장성아카데미’의 1088회째 풍경이다.
장성아카데미는 ‘세상을 바꾸는 것은 사람이고,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교육이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매주 열린다. 1995년 시작해 24년간 이어왔다. 지금까지 참여한 강사가 1000명이 넘고 강연을 들은 사람도 25만여 명이나 된다. 작년 9월 한국기록원으로부터 ‘정기적으로 열린 최장기간 사회교육 프로그램’으로 인증받았다. 올 1월에는 유럽연합 오피셜월드레코드(EU OWR)가 세계 최장기 사회교육 프로그램으로 공식 인정했다. 이날 강의를 한 이 교수는 “주민들의 지적 욕구에 대한 갈증, 열정적인 참여가 없었다면 지속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강연 들은 사람만 25만여 명
장성아카데미의 출발은 김흥식 전 장성군수의 교육관에서 비롯됐다. 김황식 전 국무총리의 셋째형이기도 한 그는 일진그룹 부회장을 거쳐 1995년 민선 1기 군수로 당선됐다. 그해 9월 장성아카데미를 시작했다. 처음엔 군의회와 주민들의 반발이 컸다. 기초자치단체에서 연 1억원 안팎의 예산을 강연료로만 쓰는 것은 무리라는 판단에서다. 김 군수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조지연 군 평생교육센터 소장은 “경영인 조찬회 등 서울에서 경제인을 위한 강연회에 매번 참석하던 김 군수가 고향에서 농촌의 참담한 교육 현실을 보고 계획한 것”이라며 “김 군수는 시골 주민의 눈을 틔워주고 교육으로 의식을 개혁해야 한다는 강한 확신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강사진은 일류로 꾸렸다. 서울의 비영리단체인 인간개발연구원에 섭외를 맡겼다. 초기에는 경제인이 대거 강단에 섰다.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 윤화진 전 한라그룹 상임고문, 김철호 전 명성그룹 회장, 강진구 전 삼성전자·삼성전기 회장 등이 시골 주민들의 눈높이에 맞춰 지식을 전했다. 노재봉, 장상, 이수성, 김황식, 이낙연 등 전·현직 국무총리도 기꺼이 마이크를 잡았다. 박원순 서울시장, 임권택 영화감독, 이국종 아주대 교수, 조정래 작가 등도 강단에 섰다. 양병무 인천재능대 교수는 장성아카데미와 맺은 인연으로 장성군의 행정혁신 사례를 담은 《주식회사 장성군》이라는 책도 냈다. 그는 네 번이나 강단에 오른 장성아카데미 최다 강연자다.
장성군은 올해부터 홍보대사직을 수락한 강연자를 명예홍보대사로 위촉하고 있다. 지금까지 윤병선 건국대 교수, 채정호 가톨릭대 교수, 심용환 역사학자, 박환 수원대 교수, 박재연 리플러스 인간연구소 소장, 육동인 강원대 교수, 이민호 제이라이프스쿨 대표, 박찬일 셰프, 류한호 광주대 교수, 이태억 KAIST 교수 등 10명이 명예홍보대사를 맡았다.
원동력은 열정적인 주민 참여
유 군수는 장성아카데미의 ‘원조 팬’이다. 2004년 광주국토관리사무소장으로 근무할 때부터 장성까지 원정 가서 강연을 들었다. 그는 “매주 책 한 권을 공짜로 읽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유 군수는 2006년 민선 4기 장성군수에 당선된 뒤 김 전 군수의 업적인 장성아카데미를 그대로 계승했다. 매주 강연을 빼놓지 않고 끝까지 듣는 유 군수와 20년 넘도록 강연장을 채우는 주민들의 열정이 장성아카데미를 이끄는 원동력이다. 유 군수는 장성아카데미를 주민들이 참여하는 자기주도형 학습 프로그램으로 발전시키겠다고 말했다. “콩나물시루에 계속 물을 주면 물은 빠질지언정 콩나물은 자란다”는 게 유 군수의 교육 지론이다.
장성아카데미는 군의 정책 결정에도 영향을 미쳤다. 장성군은 사업이나 정책을 결정할 때 해당 분야 전문가를 강사로 초빙해 집단학습 시간을 보낸다. 장성군은 ‘옐로우 시티 장성’이라는 브랜드를 정하기 전 정세욱 명지대 명예교수 등 전문가를 다섯 차례나 초청해 마케팅 전략 등을 들었다. 장성군은 이후 주민들과 협업해 지방 하천에 지나지 않았던 황룡강 일대를 연인원 100만 명 넘는 관광객이 찾는 명소로 바꿔냈다.
장성=임동률 기자 exia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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