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족 살해는 아테네 민주정신 파괴하는 금기이며 끔찍한 오염

입력 2019-05-10 17:08  

포클레스와 민주주의
배철현의 그리스 비극 읽기 (52) 정의(正義)




오레스테스는 왕권을 되찾기 위해 고향 아르고스로 돌아온다. 인간은 자신이 당연히, 그리고 반드시 존재해야만 하는 장소에서 온전한 인간으로 행세할 수 있다. 서양정신의 전범(典範)을 담고 있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임무 달성을 통해 획득하는 ‘명성’과 그 명성을 지니고 웅지를 펼칠 본향으로 돌아오는 ‘귀향’이 주제다. 영웅은 귀향을 방해하는 괴물들을 물리치면서 서서히 카리스마도 갖춘다.

명성이란 의미의 그리스어 ‘클레오스(kleos)’는 자신의 심연에서 흘러나오는 내면의 소리에 승복해 목숨까지 바치는 헌신을 통해 얻게 되는 신의 선물이다. 명성은 타인이 영웅에게 부여하는 상이 아니다. 본인이 소명에 순종할 때 생겨나기 시작하는 아우라다. 귀향이란 의미를 지닌 그리스어 ‘노스토스(nostos)’는 긴 여정을 뜻한다. 긴 여정에는 반드시 역경과 고통이 따른다. 만일 고향으로 돌아가 자신의 명성을 확인하려는 영웅이 여정 가운데 만나는 장애물들을 피한다면 그(녀)는 비겁자가 된다. 영웅의 귀향은 쉽지 않은 딜레마다. 그 딜레마를 풀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이 딜레마 앞에서 주저하고 고민한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엘렉트라》 이야기는 오레스테스가 몰래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전개된다. 그는 아버지 아가멤논을 죽인 어머니 클리템네스트라를 살해할 전략을 꾸민다. 친모 살해와 관련된 오레스테스 신화는 친부 살해와 관련된 오이디푸스 신화와 함께 아테네 관객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숙고하게 만드는 최고의 시민교육 커리큘럼이었다. 민주주의를 실험하고 있는 기원전 5세기 아테네 시민들은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자에겐 그에 합당하고 상응하는 형벌을 가하는 것이 정의라고 여겼다. 당시 도덕의 기준은 친족이나 친구에게는 선을 베풀고 적에게는 악을 행하는 것이었다. 특히 친족의 피를 흘리게 하는 것은 아테네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금기였다.

《엘렉트라》에 나오는 ‘어머니 살해’는 아테네의 민주정신을 파괴하는 끔찍한 오염이자, 전염병과 같은 터부다. 오레스테스 이야기는 인간 존엄성을 파괴하는 내용으로, 공포와 연민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비극의 주제다. 정의라는 이름으로 빈번하게 행해지는 ‘복수’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진지하게 묻고 있다.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세 극작가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그리고 에우리피데스는 모두 오레스테스 신화를 자기 나름대로 다뤘다. 우리는 오레스테스 신화에 대한 세 천재작가의 시선을 비교하며 생각해 볼 수 있다.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 3부작

소포클레스의 《엘렉트라》에 영향을 준 작품은 그리스 최초의 비극작가 아이스킬로스가 무대에 올린 3부작 《오레스테이아》였다. 그는 이 신화를 거대한 스케일로 펼쳐놨다. 기원전 458년 초연된 이 작품은 잔인한 복수를 동반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문구가 상징하는 인과응보적 정의에 대한 문제점과 그 해결점을 모색하고 있다. 오레스테스는 3부작 중 두 번째 작품인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에서 아폴로 신으로부터 신탁을 받아 클리템네스트라를 살해한다. ‘불의를 행한 자는 고통을 받아야 한다’는 법이 정의다. ‘분노의 여신’들은 오레스테스를 끝까지 추적해 그를 벌할 작정이다. 그러나 세 번째 작품 《자비로운 여신들》에서 아테네 법정에 선 오레스테스는 아테네 시민으로 구성된 배심원들로부터 무죄를 선고받는다.

아이스킬로스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인간은 고통을 통해 성숙한다’는 명제를 가르치고, 새로 등장한 아테네 도시라는 문명을 통해 ‘재판’이라는 새로운 정의를 소개했다.

소포클레스와 에우리피데스의 《엘렉트라》

소포클레스의 《엘렉트라》가 또 다른 비극작가 에우리피데스가 쓴 동명 작품 《엘렉트라》에 시기적으로 앞섰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최근 학자들은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이 나온 시기를 기원전 420년, 소포클레스의 작품은 기원전 413년으로 잡았다. 두 작품 모두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30년 내전인 펠로폰네소스전쟁 중 만들어졌다. 이들 작가는 아이스킬로스와 달리, 3부작이 아닌 1부작으로 썼다. 이들은 오레스테스의 복수에 집중했다. 그런데 이들 작품의 주인공은 오레스테스가 아니라 그의 살인을 옆에서 방조한 엘렉트라였다. 아이스킬로스의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에서는 엘렉트라가 조연이었다.

에우리피데스는 복수보다는 친모 살해와 관련된 인간 심리에 초점을 맞췄다. 그는 아폴로 신이 그런 끔찍한 신탁을 내렸다는 사실을 수용할 수 없었다. 그는 복수보다는 친모 살해라는 주제와 얽힌 인간의 고뇌를 탐구했다. 오레스테스는 친모 살해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엘렉트라의 요구에 못 이겨 마지못해 복수하는 소극적인 인물이다. 오레스테스와 엘렉트라는 모두 살인을 저지른 뒤 깊은 후회와 실의에 빠진다.

소포클레스의 《엘렉트라》에서 오레스테스는 전쟁터에 나간 사령관처럼 친모를 효과적으로 살해하기 위해 전략을 짜고 지시한다. 그는 살인을 저지른 후 분노의 여신들에 의해 고통을 당하지도 않고 죄책감을 느끼지도 않는다. 아이스킬로스와 에우리피데스 비극에서는 클리템네스트라의 애인 아이기스토스를 먼저 살해하고 극적인 효과를 얻기 위해 친모를 살해하지만, 소포클레스는 이 순서를 바꿨다. 순서의 전환으로 친모 살해보다는 복수에 중점을 둘 수 있었다. 그의 연극에선 엘렉트라가 주인공이며 오레스테스는 조연이다.

가정교사의 노래

소포클레스의 《엘렉트라》는 여주인공 엘렉트라의 노래로 시작하지 않는다. 엘렉트라의 오빠인 오레스테스와 그를 기른 가정교사의 노래로 시작한다. 해가 뜨기 직전 미케네 왕궁 앞에 오레스테스와 그의 친구 필라테스, 그리고 가정교사가 등장한다. 소포클레스는 무대에 대화하는 당사자 외에 제3자를 등장시켰다. 그리스 최초의 극작가 아이스킬로스의 무대에 항상 대화 당사자인 두 명만 등장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합창대는 비극을 관람하는 아테네 시민을 대신해 무대 위 대화 당사자들을 지근거리에서 관찰하고, 궁금증을 노래를 통해 표현한다. 소포클레스는 무대 위에 한꺼번에 세 명을 등장시켜 비극을 좀 더 박진감 넘치게 했다. 세 명 중 한 명은 말수가 적다. 그는 바로 옆에서 주인공들의 숨소리를 들으며 동참하는 인물이다.

가정교사의 이름은 그리스어로 ‘파이다고고스(paedagogos)’다. 파이다고고스는 보통명사인 동시에 고유명사이기도 하다. ‘걸음마를 가르치는 사람’이란 뜻이다. 교육학이란 영어 단어 ‘페다고지(pedagogy)’가 이 단어에서 유래했다. 오레스테스의 가정교사는 그에게 걸음마를 비롯한 인생에 필요한 기술을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그의 생명을 보존시켜준 은인이다. 그는 클리템네스트라가 아가멤논을 살해할 때 오레스테스를 그 현장에서 빼돌려 델피신전이 있는 포키스에서 양육했다. 파이다고고스는 오레스테스와 그의 친구에게 친모 살해의 전략을 짜라고 얘기한다.

“옛날에 도련님의 아버지가 살해됐을 때, 내가 도련님의 친누이에게서 도련님을 받아 구해내 이렇게 성인이 되도록 길렀습니다. 살해된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세요. 그러니 이제는 오레스테스 도련님과 둘도 없는 친구인 필라테스와 함께 어떻게 할 것인지 속히 의논하십시오.”(11~16행)

오레스테스는 전략을 짜는 능숙한 야전사령관처럼 가정교사에게 말한다. “그대는 늙었고 그 사이 많은 세월이 흘렀어요. 그들(아르고스 시민들)은 그대를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대는 이렇게 둘러대시오. 나는 나그네이고 포키스사람 파노테우스에게서 오는 길이라고. 그리고 그대는 맹세하고 나서 전하시오. 오레스테스는 냉혹한 운명에 의해 퓌토 경기에서 달리던 전차에서 굴러 떨어져 죽었다고 말이오.”(41~49행) 오레스테스는 청동유골단지를 들려주며 그것이 자신의 유골이라고 말하라고 시킨다.

배철현 < 작가 ·고전문헌학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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