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경갑 기자 ]
한국화의 전통을 잇는 수묵화 작가들은 고민이 많다. 전통과 현대의 경계에서 늘 서성거려 보지만 뾰족한 해답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1970년대 들어 적잖은 작가가 산수화의 현대성을 모색하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되고 있다.
중견 여성 수묵화가 강미선 씨(59)도 그중 한 사람이다. 스승인 남천 송수남(1938~2013)과 함께 ‘현대 수묵화 운동’을 벌여온 강씨는 지난 30년 동안 오로지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캔버스와 붓을 들고 곳곳을 헤맸다. 자신만의 잣대와 프레임으로 전통 수묵의 세계에 천착해 왔다.
지난 14일 서울 통의동 아트사이드갤러리에서 개막한 강씨의 개인전은 척박한 현실에서도 한국 수묵화의 계보를 잇겠다는 작가의 끈기와 열정, 집념을 보여주는 자리다. 전시장에는 특유의 붓질을 통해 한지에 수묵으로 표현한 근작 정물과 풍경화 34점이 걸렸다. 백자 도자기를 비롯해 꽃가지, 과일, 나무, 불탑, 한옥 처마 등 정물과 풍경의 경계를 넘나들며 생활 주변을 일기를 쓰듯이 화폭에 담아낸 작품들이다.
홍익대 미대와 대학원을 졸업한 작가는 “제 작업은 사람을 향한 마음의 상태, 즉 관심(觀心)”이라며 “수묵으로 일상의 사물을 기록하는 일은 곧 한국화에 대한 개인적 신념을 대변하는 작업”이라고 말했다. 전시회 제목을 ‘관심’으로 붙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결이 거친 닥종이를 여러 겹 발라 올린 화면에 그려 넣은 먹그림은 투박한 질감과 어울린다. 신작임에도 고향의 장맛과 같은 세월의 깊이와 정취가 느껴진다. 그림에 등장하는 정물과 풍경들은 동양 회화의 전통적 주제인 ‘기명절지(器皿折枝: 모양이 좋은 그릇이나 꽃가지)’의 현대적 변주를 보는 듯하다. 때때로 약간의 채색을 사용해 농담(濃淡)을 돋보이게 했다.
우윳빛 백자항아리와 매화, 그릇에 소박하게 담긴 석류, 그윽한 눈으로 세상을 굽어살피는 불상과 고풍스러운 다기(茶器), 난초의 우아한 자태, 점점이 홍시 빛 물감을 흩뿌려 만든 듯한 까치밥 등 강씨의 정물화 곳곳에는 사소하지만 깨알 같은 행복으로 다가오는 사물들에 대한 소담스러운 애정이 가득하다.
강씨는 수묵화를 “기다림의 작업”이라고 했다. 먹을 몇 번 올려 건조시키고 다시 그리는 무수한 반복 과정을 통해 작품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이렇듯 한 획 한 획 쌓아올리는 행위의 흔적들이 응집된 그의 작품에는 한지가 지닌 고유의 물성이 돋보인다. 전통 회화의 요체를 흡수하면서도 화강암 표면과 같은 거칠고 투박한 질감을 지녔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내 마음과 마주하고, 이를 헤아리는 수행의 과정(관심)”이라는 작가의 말이 귓전에 맴돈다.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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