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의 '중공업 드라이브'…고도성장·자립경제 두 토끼 잡았다

입력 2019-05-17 17:56  

이영훈의 한국경제史 3000년
(53) 시간과의 경쟁

1980년대 중반 경제 틀 갖춰
열망 컸던 DJ의 '대중경제론'




자립적 국가경제의 건설

안토니 가우디가 설계한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1883년 착공됐는데 아직도 공사가 계속되고 있다. 국가경제를 걸작으로 건축함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혁명공약으로 내건 ‘자립적 국가경제의 건설’은 적어도 한 세대의 피와 땀을 요구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오래 기다릴 수 없었다. 박 대통령과 경쟁한 정치가와 지식인은 더 좋은 대안이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한목소리로 박 대통령의 개발정책을 비판했다. 고도성장에도 불구하고 국가경제 자립도를 나타내는 지표는 쉽게 개선되지 않았다. 오히려 악화하는 듯이 보였다. 고도성장은 겉치레만 화려한 소수 특권층의 잔치로 매도됐다. 대중은 고도성장의 과실을 향유하면서도 그에 대한 비판에 동조했다. 어느 시대나 대중은 이중적이었다.


국가경제의 자립도가 개선 추세로 돌아선 것은 1980년대 중반부터다. 성장의 원동력인 수출공업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중간재와 기계를 외국에서 수입해야 했다. 주로 일본으로부터였다. 수출이 증가할수록 외국산 중간재와 기계에 대한 의존도는 커졌다. 대체로 1983년까지였다. 이후 수입 중간재와 기계에 대한 의존도가 감소하기 시작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수급(需給) 관계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20% 이하의 낮은 수준에 머물렀다. 그것이 1980년대에 꾸준히 증가해 1989년에는 70%에 육박했다. 만성적 적자의 무역수지도 1986년에 이르러 처음으로 흑자를 맛봤다. 이 모든 지표의 개선은 중간재와 기계가 조금씩 국산화됐기 때문이다.

한국 경제가 나름의 오장육부를 갖춘 것은 1980년대 중반의 일이다. 그 모두 1973년부터 박 대통령이 감행한 중화학공업에 대한 투자 덕분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시간과의 경쟁에서 패배했다. 그가 공약한 ‘자립적 국가경제의 건설’은 그의 비극적 죽음 이후에야 가까스로 실현됐다.

대중경제의 제기

박 대통령의 수출주도형 개발정책은 출발부터 적지 않은 저항에 부딪혔다. 1965년 야당 민중당은 그 대안으로 ‘100만 안정 농가’의 창설을 주장했다. 1966년 민중당 대통령 후보 유진오는 “외자 의존경제와 재벌과 정상배만 위하는 경제로부터 탈피해 농민, 노동자, 봉급생활자, 중소기업가를 망라하는 대중이 본위가 되는 경제를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67년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 신민당은 외자 도입과 재벌 특혜 지양, 대중 투자와 농공 합작의 실현, 대일 예속체제 중단과 자주체제로의 전환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야당의 대중경제론은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신민당의 김대중 후보가 출간한 《대중경제 100문 100답》에서 완성을 봤다. 이 책은 박현채 등 4인에 의해 대리 집필됐다. 비록 대리 집필이지만 당시 김대중 후보의 공개적인 글이나 발언으로 볼 때 이 책은 그의 이념과 정책을 충실하게 대변했다. 박현채는 6·25전쟁 당시 전남 백아산에서 활동한 빨치산 출신으로, 박정희 정부의 개발정책에 대한 비판을 선도한 재야 경제학자였다. 1971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과 박현채는 대중경제론으로 의기투합했다.


대중경제의 논리

두 사람이 본 한국 사회는 민주주의를 결여한 가운데 군사폭력의 전체주의가 횡행하는 암울 그 자체였다. 경제는 한마디로 매판 독점자본주의였다. 식민지 자본주의에 기인하는 산업구조의 파행성은 해방 후 원조와 차관으로 인해 더욱 심해졌다. 중소기업의 성장이 차단되고, 지역·산업·계층 간 격차는 더욱 벌어졌다. 체념과 불만의 대중사회가 팽배해 국가체제의 위기를 부르고 있었다. 기업은 영세하고 기술은 후진적이어서 국제경쟁을 도저히 이길 수 없다. 자본축적도 빈약하다. 이런 실정에서 외국의 자본, 기술, 원자재를 들여와 가공·수출하면 무역수지 적자는 불가피하다. 개방체제는 대외종속을 부르며 국제자본의 욕망을 충족시킬 뿐이다. 이처럼 대중경제론의 대외 인식은 부정적이고 방어적이었다.

대중경제론이 모색한 대안의 길은 ‘한국형 혼합경제체제’였다. 이는 국가경제를 계획해 기계·중화학공업은 국가자본이 주도하고, 그 밖의 영역은 민간자본이 주도하는 경제체제다. 대외적으로는 개방체제를 지양하고 자국의 원료와 농업에 기반을 둔 상대적인 자급자족체제를 추구할 것이다. 민간공업은 국지적 시장권에 뿌리를 두고 농업과 조화롭게 발전해야 한다. 공업 제일주의를 불식하고 농공 합작주의로 전환해야 한다. 기계공업과 중화학공업 건설을 위해 차관을 도입해야 하나, 대외종속 우려가 크므로 낮은 수준에서 관리해야 한다. 차관은 필요악이다. 이 같은 시각에서 대중경제론은 박정희 정부가 차관으로 건설하는 석유화학, 자동차조립, 전기·전자공업을 우리 수준에 비춰 ‘사치적’이라고 폄훼했다.

대중민주주의의 정치

대중경제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대중민주주의의 지원을 받을 필요가 있다. 대중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우선 노동조합의 활동이 자유로워져 자본과 노동 간 세력균형을 이룰 필요가 있다. 그 위에 대중민주주의를 이루는 첫걸음은 근로자의 경영 참여다. 이를 위해 기업 이익의 일부를 종업원에게 주식으로 배당하는 종업원지주제를 시행해야 한다. 한걸음 더 나아가 기업별로 노사공동위원회를 설치해야 한다. 기업은 이 위원회에 영업보고서를 의무적으로 제출하며, 위원회의 권고는 기업 경영에 상당한 규제력을 가져야 한다. 이 같은 대중민주주의가 대중경제와 보조를 맞추면 종속적 국가경제는 자립적 민족경제로 대체되고, 대중 억압의 전체주의를 대신해 밝고 건강한 민주주의가 성숙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야당 후보는 이와 같은 대중경제론 공약으로 적지 않은 지지를 확보했다. 박 대통령은 3선에 성공했지만 고전한 편이었다. 김대중 후보는 선전했으며, 박정희의 강력한 경쟁자로 부상했다. 대중경제론의 정치적 함의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역사적 평가

되돌아보건대 대중경제론은 많은 후진국에서 실패한 내포적 공업화론, 포퓰리즘, 신민주주의론의 혼합에 불과했다. 그것의 실현 가능성은 역사적 전제조건에서나 경제적 합리성에서나 현실적 정책수단에서 전무했다. 그것은 치명적으로 ‘규모의 경제’를 결여했다. 대중경제론이 추구한 자급자족적 국가경제에서 민간공업이나 국가 주도 생산재공업이 국제적 수준의 ‘규모의 경제’를 실현할 만큼의 넓은 시장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결과 애써 건설한 공장은 수출 능력을 갖지 못하며, 이는 외환의 애로를 불러 추가적인 공장 건설이나 기술 도입을 어렵게 할 수밖에 없다. 1980년대 중반 이후 국가경제 자립도를 대변하는 지표가 뚜렷이 개선되자 대중경제론은 슬그머니 자취를 감췄다.

김대중은 1986년에 《대중경제론》을, 1996년에 《대중참여경제론》을 출간했다. 이번에는 미국 박사 출신인 다른 경제학자가 대리 집필했다. 1996년의 책은 “1960년대 초 한국 정부는 현명하게도 외부지향형 경제개발 전략을 선택했다”면서 박 대통령의 개발전략을 높이 평가했다. 1971년의 대중경제론은 완벽하게 폐기됐다. 그렇지만 김대중은 결코 그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았다. 박 대통령의 권위주의 정치와 개발정책에 대한 그의 비판은 이후에도 멈추지 않았다. 이번에는 정부가 부당하게도 시장에 개입해 자원 배분의 효율성을 왜곡했다는 주류 경제학의 논리가 비판의 논리를 이뤘다.

1998년 이윽고 대통령이 된 김대중은 영미형의 시장경제야말로 우리의 갈 길이라는 ‘DJ노믹스’를 제창했다. 자립적 국가경제 건설을 위한 역대 정부의 개발전략은 여기서 방향감각을 상실했다. 이후 지금까지 이어지는 감속성장의 시대가 열렸다. 이 대목에서 역사가는 실소를 금치 못한다. 권위주의 정치는 어느 정치가의 권력에 대한 탐욕에서가 아니라, 정치인 사이에 근본적 대립이 조성되고 대중이 그것을 조정할 능력이 없을 때 불가피한 덕목으로 성립한다. 고도성장 체제가 해체될 위기에 처했을 때 다른 대안이 있었을까. 김대중의 대중경제론은 유신으로 이어진 박정희의 권위주의 정치를 유도했다. 역사가의 눈엔 그 점이 두드러져 실소를 자아내는 것이다.

이영훈 < 前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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