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진의 와일드 노마드 라이프 (4)
베트남 퀴논
다낭과 냐짱 사이, 베트남 중부를 여행하는 이들이 중간에 잠시 들르거나 머무는 도시. 베트남 퀴논 앞에 붙는 수식어는 그간 이랬다. 이곳을 여행의 최종 목적지로 삼는 이가 별로 없다는 뜻이다. 뀌논, 퀴논, 꾸이년. 한글 표기 지명도 각색이라 검색도 어렵다. 지난해 겨울, 영국 런던에서 발행되는 일간 신문 가디언이 선정한 ‘2018년 겨울 핫 플레이스 10 여행지’ 목록에 이름을 올린 것이 그나마 이 도시와 연관된 최근 소식이다.
이렇게 낯선 이름 앞에서 여행자의 호기심엔 가속이 붙는다. ‘남들이 많이 안 가본 데’에 먼저 발 들이는 것을 좋아하는 ‘여행 얼리어답터’라면, 올여름 인파를 피해 조용히 휴양할 수 있는 휴가지를 찾고 있다면 더더욱 이 지명을 기억에 쟁여두자. 공사 중인 고속도로가 뚫리고 이 도시와 세계를 ‘직항’으로 연결해줄 퀴논 국제공항이 완공되면 이 신비로운 해안 도시의 청순한 민낯을 볼 기회도 얼마 남지 않았다.
무명의 도시에서 뜨는 여행지로
베트남의 동해를 옆에 두고 1번 국도를 달린다. 호이안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퀴논으로 향하는 길. 약 330㎞에 달하는 여정에서 펼쳐지는 풍경은 우리나라의 동쪽 해안으로 향하는 6번 국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끝없이 펼쳐진 논, 놀랍도록 닮은 행색의 허수아비, 근면한 소와 농부들, 끝에 나타나는 바다. 중간중간 구멍가게에 가까운 휴게소에 들러 간식, 사탕수수즙으로 지루함과 허기를 달랜 지 약 다섯 시간 만에 퀴논에 도착했다.
이 도시에 대해 아는 사실이라곤 어떤 기사에서 본 한국과의 연결고리뿐. 퀴논은 베트남전 당시 ‘맹호부대’의 주둔지였다. 이태원에 아오자이를 입고 논(베트남 전통모자)을 쓴 여인이 자전거를 끌고 걷는 벽화로 꾸민 ‘퀴논 거리’가 있는 이유는 맹호부대의 본부가 용산에 있어서다. 2016년 용산구와 퀴논은 전쟁의 아픔을 치유하고 화해의 의미를 담아 이태원엔 퀴논 거리를, 퀴논의 안푸팅 국제무역지구엔 용산 거리를 냈다.
퀴논의 역사를 짚을 때 등장하는 굵직한 단어는 ‘참파 왕국’과 ‘전쟁’이다. 이 지역이 가장 화려한 시절을 보낸 시기는 베트남 중부를 지배했던 참파 왕조가 이곳을 수도로 정한 11세기 무렵. 15세기 참파 왕조가 베트남족에 의해 멸망되기 전까지 퀴논은 400여 년 동안 ‘왕의 도시’로 영화를 누렸다. 이후의 역사는 세력 다툼이 횡행한 베트남 근대 왕조의 격전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의 주둔지, 베트남전 당시 공산군과 반군, 미군과 한국군 사이의 각축전 등 대부분 암울한 전쟁사로 뒤덮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어두운 과거가 퀴논을 (오버 투어리즘으로 몸살을 앓는 베트남의 대표적 관광지역에선 볼 수 없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해안 도시이자 휴양지로 남게 한 공신이다. 지금 베트남의 부호들은 이곳을 은퇴 후 안식년을 보낼 주거지로 손꼽는다. 삼면이 산,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미개발지의 청청한 해변에는 세계 호텔 브랜드들이 앞다퉈 세우는 새 리조트와 호텔이 들어서고 있다. 목재 가공과 가구 제조가 주요 산업의 전부였던 빈딘성의 작은 주도는 이제 ‘관광업’이라는 새로운 청사진과 함께 장밋빛 미래를 맞이할 준비를 마쳤다.
베트남의 몰디브, 비밀의 섬 키코
여행자들이 중부의 다른 휴양지보다 다소 접근성이 떨어지는 퀴논을 찾는 이유가 있다. 마을을 따라 완만하게 형성된 42㎞ 길이의 해안선, 그 안에 숨은 비밀스러운 해변 때문이다. 키코 비치는 가장 인기 높은 목적지. 연유는 단순하다. 인적이 드물어서 물이 맑다.
베트남어를 할 줄 모르는 외국인 여행자가 이 장소에 닿는 방법엔 두 가지가 있다. 머무는 호텔 및 리조트에서 제공하는 키코 비치 하루 혹은 반나절 투어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된다. 온전히 자력으로 가고 싶다면 관광용 택시를 대절해 시내에서 약 22㎞ 떨어진 논리 반도로 향해야 한다. ‘바람을 품는 여울’이라는 서정적인 이름을 가진 한적한 어촌 마을 ‘에오져’에선 지역 제철 해산물로 꾸린 점심식사를 포함한 키코 비치 투어 혹은 배편을 예약하는 작은 여행사가 몰려 있다.
가이드북은 베트남의 전통적인 바구니 배 ‘퉁버이’나 카누를 타라고 안내하지만 키코 비치의 절경을 좀 더 오래 만끽하고 싶다면 바이크만큼이나 빠르게 질주하는 모터보트에 몸을 싣길 권한다.
섬에는 상업시설이 별로 없다. 땡볕을 피할 수 있는 파라솔과 선베드, 성수기에만 운영하는 몇 곳의 작은 식당과 가게 정도가 유료 시설의 전부다.
풍광의 절정은 섬의 북쪽, 기암절벽 아래에서 만난다. 수만 년간 파도와 바람에 깎인 이 ‘포인트’는 마치 천장 없는 동굴처럼 독특한 지형이다. 바다와 모래사장이 비밀스럽게 숨은 안쪽으로 들어가면 ‘쪽빛’ ‘초록’ ‘파랑’ 색이 층층이 이어진 기묘한 물색이 온전히 눈에 담긴다. 섬의 다른 편엔 돌산에 둘러싸인 소금 석호도 있다. 물고기가 한번 들어오면 절대 빠져나갈 수 없는 천연 가두리로 어부들에겐 ‘새우 노다지’로 유명하다.
에오져와 키코 사이, 중간 즈음엔 산호지대가 있다. 스노클링과 스쿠버다이빙을 즐길 수 있다는 뜻이다. 근사한 요트에서 곧장 바다로 뛰어드는 호주의 그레이트배리어리프나 이집트 홍해와 달리 섬처럼 띄운 낡은 스티로폼 판이 다이버의 기지 역할을 한다. ‘아직 관광지의 때가 묻지 않은’ 근거라고 포장하기조차 어설픈 편의 시설이지만, 수면 아래 산호초와 그 사이를 유영하는 열대어가 만드는 절경은 어떤 다이빙 포인트에 견줘도 모자람이 없다. 시설이 좋든 나쁘든 자연의 맨 얼굴은 틀림없이 공평하니까. 인간이 물색없이 건드리지만 않으면 말이다.
참파왕국의 위상 살필 수 있는 유적
바다를 실컷 즐긴 이들은 시내로 향한다. ‘탭 도이’는 대부분의 관광객이 들렀다 가는 명소로 11세기에 이곳을 점령한 참파 왕국의 위상을 엿볼 수 있는 사원이다. 안내서에선 ‘참 건축 양식의 정수가 담겨 있다’고 설명한다. ‘접착’ 역할을 하는 어떤 건축재도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납작한 벽돌만을 켜켜이 쌓아 세운 1000년 전의 건축 양식은 지금도 그 원리를 밝히지 못한 채 불가사의로 남아 있다. 알고 보는 이는 탑 주변을 한 바퀴 돌며 샅샅이 뜯어 관찰하고 모르는 이는 그저 기념촬영에 여념이 없다. 정오에 찾으면 태양 빛이 탑 안에 수직으로 내리꽂히는 장관을 볼 수 있는데, 모자, 선글라스, 양산 같은 차단 도구는 필수다.
빈딘 박물관은 역사, 전쟁, 혹은 ‘베트남 전’에 관심이 높은 이라면 찾을 만하다. 단 특정 주제 아래에서 선별된 유물과 예술품을 전시하는 대도시의 근사한 박물관과는 사뭇 다른 장면을 만난다. 참파 왕조의 소장품과 유물, 베트남전에 사용한 각종 무기와 군사 용품, 기록물, 지역의 부족 문화, 자연사의 ‘일부’를 알 수 있는 유물 등 소장한 모든 것을 최대한 긁어모아 곳곳에 나열하고 있다. 그 두서없고 순박한 ‘큐레이팅’이 오히려 독특한 경험을 선사한다. 그저 ‘땡볕을 피해 구경할 만한 곳’을 찾은 게 분명한 관람객들의 나른한 걸음, 베트남전 섹션 앞에서 골똘히 생각에 잠긴 (사연 많아 보이는) 노인을 엿보는 일도 전시 관람만큼이나 흥미롭다.
중부식 쌀국수에 달콤한 연유커피 한 잔
도시든 바다든, 베트남을 여행하는 동안 가장 간절하게 떠오르는 것이 있다. 무더위와 피로, 불쾌감이 단박에 가시는 베트남식 연유커피, ‘카페쓰어다’ 얘기다. 퀴논 시내엔 서울이나 도쿄 못지않게 세련된, 즉 ‘사진 찍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리기 좋은’ 인테리어를 갖춘 카페가 꽤 많다. 한 곳만 골라야 한다면 탭 도이에서 걸어서 2분 거리에 있는 ‘덴 커피’를 권한다. 이곳은 지역 장애인의 자립을 돕는 비영리단체 응우옌 응아에서 운영하는 카페다. 입구에 잔뜩 주차된 오토바이 사이를 헤치고 안으로 들어서면 바깥과 사뭇 다른 세련된 분위기와 여행자를 위한 작은 서가가 눈에 띈다. 가게 안쪽엔 응우옌 응아의 학생들이 그린 그림부터 수제 공예품 등이 빼곡하게 진열돼 있다. 누군가에게 줄, 혹은 퀴논 여행을 기억할 ‘좀 괜찮은 기념품’을 찾고 있다면 의미있는 쇼핑을 할 수 있다.
베트남에선 특정 식당을 ‘맛집’으로 꼽기보다는 지역마다 조금씩 다른 음식의 종류를 꼽아 먹는 것이 더 풍부한 미식 경험을 하는 방법이다. 퀴논에서 그런 음식은 ‘분까’다. 바다에 면한 중남부 지역 사람들이 즐겨 먹는 쌀국수로 소, 돼지, 닭 대신 흰살 생선으로 육수를 내는 것이 특징이다. 말간 국물과 보드라운 면 위에 어묵, 튀기거나 구운 생선이 얹어 나온다. 담백한 맛 그대로 즐기거나 매운 고추를 다져 넣은 간장을 곁들여 먹으면 여독마저 풀리는 기분이다. 시장 안 노점이든, 어제 새로 생긴 곳이든, 관광객만 득시글거리는 곳이든 어딜 가도 맛있게 즐길 수 있다.
퀴논 비치 앞은 저녁에 어슬렁거리기 좋아하는 이들이 해가 식는 시간부터 슬슬 모여드는 번화가다. 조금 늦은 간식 혹은 조금 이른 저녁 식사를 해결할 수 있는 ‘스트리트 푸드’ 노점들도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퀴논식 ‘어부의 집’에서 그날 갓 잡아 주문 즉시 구워주는 싱싱한 새우나 랍스터(퀴논의 특산물이다)는 키코 비치의 절경만큼이나 감각을 자극한다. 해산물의 탱탱한 순살을 입안에 가득 채우고 묽은 동남아시아 맥주를 얼음 잔에 따라 물처럼 벌컥벌컥 들이켜다 보면 ‘이 좋은 여행지는 나만 알고 싶다’는 옹졸한 욕심마저 슬그머니 떠오른다.
퀴논(베트남)=글·사진 류진 여행작가 flyryu@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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