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불명에 빠진 30대 영혼
유인원 보노보 몸에 들어가
죽음 앞에 선 인간 선택 다뤄
[ 은정진 기자 ]
“2017년 여름 영국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의 책에 나오는 ‘시간의 어떤 순간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구절을 우연히 보고 30여 년 전 어머니의 임종을 떠올렸어요. 의식이 없던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사흘 동안 중환자실을 지키며 ‘엄마의 영혼은 어디쯤에 있을까’ 생각했었죠. 다시금 상상해 보니 인간의 조상인 영장류가 살던 600만 년 전쯤으로 가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그렇게 그날 밤 초고를 쓰기 시작했죠.”
정유정 작가(53·사진)는 3년 만에 내놓은 신작 장편소설 《진이, 지니》(은행나무)를 쓰게 된 계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정 작가는 ‘스릴러의 여왕’이라고 불린다. 《7년의 밤》 《종의 기원》 등 스릴러 장르를 통해 인간 본성과 그 안에 숨겨진 ‘악(惡)’에 대해 깊게 파고들었다. 21개국에서 번역된 《종의 기원》은 지난 3월 일본 아마존에서 아시아문학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일본 미스터리 소설 여왕’인 미야베 미유키로부터 ‘한국의 스티븐 킹’이란 얘기를 들을 만큼 정 작가는 한국의 대표적인 스릴러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진이, 지니》는 그의 이전 작품들과는 성격이 다르다. 판타지 소설에 가깝다. 서울 서교동 은행나무 본사에서 만난 정 작가는 “제 첫 번째 변신”이라며 “이야기에 담긴 의미와 재미, 메시지에 오롯이 집중한 소설”이라고 말했다.
소설은 교통사고로 의식불명이 된 사육사 이진이의 영혼이 유인원인 보노보 ‘지니’의 몸속으로 들어가면서 시작된다. 진이는 자신을 돕는 백수 청년 김민주와 함께 원래 몸속으로 돌아가기 위해 사흘 동안 고군분투한다.
정 작가는 소설을 구상하면서 침팬지 대신 보노보를 진이의 파트너로 삼았다. 인간과 유전자가 98.7% 일치하는 보노보는 침팬지보다 연대의식과 공감·인지능력이 뛰어나다. 정 작가는 6개월여 동안 일본 구마모토 보노보 보호구역과 교토대 영장류센터를 취재하며 보노보의 목소리와 움직임, 손만큼 발을 자주 사용하는 습성까지 치밀하게 소설에 녹여냈다.
보노보가 된 진이는 자신의 몸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결국 자신의 죽음 앞에서 스스로 정하는 인간으로서 타당한 선택을 한다. 작가는 “죽음은 운명적으로 정해져 있지만 그 죽음 앞에서 인간이 어떤 태도를 보일 것인가는 스스로 정할 수 있다”며 “진이처럼 치열하게 살다가 결국 인간으로서 품위를 유지하면서 죽음을 맞는 것을 결정할 수 있는 모습이야말로 인간의 마지막 자유의지가 발현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죽음을 통해 현재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이 작품은 김민주의 성장소설로도 읽힌다. 소심하고 의욕이 없던 민주는 진이를 돕는 과정에서 삶의 의미를 깨닫는다. 정 작가는 “가장 애착이 간 인물”이라며 “소설을 쓰면서도 민주가 변해가는 모습이 대견하고 즐거웠다”고 말했다.
스릴러에 이어 판타지에 도전한 정 작가는 어떤 작가로 기억되고 싶을까. “작가 대신 ‘이야기꾼’으로 불렸으면 좋겠어요.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스릴러든 판타지든 장르를 가리지 않고 거리낌 없이 가져다 쓸 거예요. 다만 통속적 재미를 넘어 문학적 품격과 의미도 갖춰야겠죠.”
은정진 기자 silve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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