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일 챙기다 통장이 '텅장'"
출혈 지출에 허리띠 졸라매지만
"그래도 효도하니 뿌듯"
[ 은정진 기자 ] 경기도의 한 반도체 회사에 다니는 양모 대리(33)는 5월 내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 어린이날, 어버이날에 더해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 생신이 모두 5월에 몰려 있다 보니 어른들과 조카들 용돈에만 100만원을 훌쩍 넘는 돈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올해는 자영업을 하는 남편 수입이 예년만 못해 양가 어머니에게 용돈 대신 작은 선물을 드릴까도 고민했지만, ‘그래도 어버이날인데…’하는 마음에 결국 20만원씩 드렸다. 양 대리는 “사람 구실 하겠다고 너무 무리하는 건 아닌지 고민했지만 결국 용돈을 드렸다”며 “무슨 날, 무슨 날 같은 것 좀 다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어버이날, 스승의 날, 어린이날 등 5월에 몰려 있는 각종 기념일을 챙기는 데 쓰는 비용 때문에 김과장 이대리들이 ‘가정의 달 후유증’을 앓고 있다. 갑작스레 늘어난 지출로 통장이 텅텅 빈 ‘텅장’이 되면서 마이너스 통장을 개설하거나 적금을 깨는 것은 물론 여름 휴가 예정지까지 바꾸는 사례도 등장했다. 5월 가정의 달을 힘겹게 보낸 김과장 이대리들의 이야기를 모아봤다.
‘가정의 달’만 되면 휘는 허리
건설회사에 다니는 박모 과장(34)은 얼마 전 어렵게 모아왔던 결혼준비용 적금 통장을 해약했다. 어머니 생신이 이달인 데다 하나뿐인 여동생이 결혼하면서 예식비용부터 신혼살림까지 대부분을 박 과장이 직접 챙겨줘야 했기 때문이다. 대학원생인 여동생이 돈을 모아뒀을 것이란 기대를 할 수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4월 월급은 건강보험료 정산으로 평소보다도 줄었다. 그는 “가정의 달 이래저래 들어가야 하는 돈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힘든 한 달이었다. 나도 곧 시집가야 하는데 답답하다. 당분간 어쩔 수 없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살아야 한다”며 한숨을 쉬었다.
대기업에 다니는 김모 대리(31)는 이번 달에만 결혼식장을 네 곳 다녀왔다. 어버이날 용돈과 어린이날 조카 선물을 마련하느라 평소보다 100만원가량 더 썼는데 결혼식 축의금까지 내야 해 생활비는 더욱 빠듯했다. 김 대리는 “각종 기념일에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주말 결혼식까지 일일이 챙기느라 금전적으로나 심적으로 여유가 없는 한 달”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국내 모 건설사에 입사한 정모 사원(28)은 이번 달 드린 부모님 용돈 때문에 허리가 휘었다. 수습사원이어서 아직 월급을 100% 못 받고 있지만 입사 후 맞은 첫 어버이날인 데다 부모님 결혼기념일까지 겹쳐 월급의 3분의 1가량을
버이날 용돈으로 드렸다. 정 사원은 “취업을 기다린 부모님께 용돈을 드린 건 뿌듯하지만 아직 월급이 적어 금전적인 부담이 크다”며 “다른 기념일도 챙기려면 따로 여윳돈을 모아둬야겠다”고 말했다.
5월 후유증에 너도나도 ‘긴축재정’ 호소
가정의 달 지출이 생각보다 커지다 보니 다른 곳에서 씀씀이를 줄이는 직장인이 많다. 디스플레이 업체에 최근 취업한 김모씨(28)는 “취업 기념으로 어버이날과 스승의 날에 50만원이 넘는 돈을 썼다”며 “당초 여름 휴가를 해외로 가려고 했지만 국내 여행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다”고 아쉬워했다.
경기 화성의 한 제조업체에 다니는 김모 대리(34)는 지난주부터 자체 긴축 재정에 들어갔다. 어버이날을 맞아 망가진 부모님 집 화장실 리모델링을 해드리는 데 300만원을 썼기 때문이다. 공사
기간 부모님이 지낼 호텔 숙박비 50만원, 용돈 50만원 등도 추가로 들어갔다. 이에 더해 남자 친구 부모님께 소갈비 선물세트를 보내느라 30만원을 썼다. 내년 초 결혼을 앞두고 있는 그는 “어버이날 제대로 선물을 해본 적이 없어 더 많은 것을 해드리고 싶지만 결혼 준비 비용도 빠듯해 당분간 뭐든 아껴써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경기 파주에 있는 출판사에 다니는 김모 과장(34)은 올해 양가 어머니가 환갑을 맞았다. 더욱이 장모님 환갑이 5월이어서 어버이날 용돈 외에 장모님 여행경비로 100만원을 따로 드려야 했다. 7월엔 어머니 환갑까지 다가온다. 김 과장은 “계속되는 기념일 탓에 지난 3월부터 적금을 넣지 않고 있다”며 “결혼 이후엔 늘 5월 지출이 만만치 않았는데 올해는 환갑까지 더해지다 보니 호주머니 사정이 최악”이라고 말했다.
가정의 달 스트레스? “난 안 받아”
가정의 달 지출을 스트레스로 생각하기보단 행복으로 받아들이려는 직장인도 눈에 띄었다. 유통회사에 다니는 김모 대리(33)는 생애 처음으로 가정의 달을 뿌듯하게 보냈다고 했다. 부모님이 결혼한 이후 30여 년 동안 집에 들여놓지 않았던
어컨을 이번 어버이날에 선물로 사드렸기 때문이다. 정가만 400만원에 달해 처음엔 금전적으로 부담이 만만찮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대학 동기의 사내 임직원 쇼핑몰을 통해 절반에 가까운 220만원에 운 좋게 구입할 수 있었다. 김 대리는 “부모님께서 에어컨을 받곤 눈물을 글썽거렸다”며 “에어컨 구입을 위해 적금을 들었는데 예상외로 싸게 산 덕에 이래저래 행복하다”고 말했다.
서울의 한 유통기업에 다니는 김모 대리(30)는 “어차피 5월은 돈 쓰는 달이니 지출 스트레스를 받지 말자”고 다짐했다. 평소 발레와 요가 학원을 다니는 그는 스승의 날을 맞아 강사들에게 3만원짜리 꽃바구니를 보냈다. 어버이날엔 시부모님과 친정 부모님께 용돈도 30만원씩 드렸다. 특히 5월엔 쉬는 날이 많아 남편과 외출을 많이 해 지출이 다른 달보다 컸지만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그는 “이번 달엔 저축이 평소의 절반 수준으로 줄었지만 마음 편히 생각하기로 했다”며 “어차피 쓸 돈이라면 스트레스를 받으며 쓸 필요 없지 않으냐”고 말했다.
은정진 기자 silve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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