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사·마블·루카스필름·폭스 잇따라 인수
[ 설지연 기자 ]
1920년대 미키마우스 만화로 시작한 월트디즈니컴퍼니는 이제 단순 애니메이션 제작 회사가 아니다.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거대한 미디어 그룹이 됐다. 월트 디즈니와 그의 형 로이 디즈니의 창업 이래 다수의 최고경영자(CEO)가 거쳐 갔지만, ‘미디어 그룹’ 디즈니를 논할 때 밥 아이거 현 CEO 겸 회장은 절대 빼놓을 수 없다.
2005년 CEO로 취임해 15년째 디즈니를 이끌고 있는 그는 회사의 외연을 키운 동시에 정체성을 되살려 침체하던 디즈니를 부흥시킨 주역으로 꼽힌다. 네 차례나 퇴임 의사를 밝혔지만 디즈니 안팎에선 여전히 그의 리더십이 더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M&A로 침체하던 디즈니 부흥
아이거 회장은 첫 직장으로 디즈니에 입사한 건 아니지만 20여 년간 ‘디즈니맨’으로 살았다. 1974년 대학을 졸업한 뒤 그는 ABC방송국에 입사했다. 그러나 1996년 방송국이 디즈니에 합병되면서 소속이 바뀌었다. 그는 1999년 월트디즈니 인터내셔널 사장에 올랐고, 이듬해 최고운영책임자(COO)로 발탁됐다.
2005년 CEO로 디즈니 사령탑까지 오른 그는 취임 당시부터 큰 과제를 안고 있었다. 급변하는 콘텐츠 시장에서 디즈니가 살아남기 위해 변신을 이끌어내야 했다. 당시 디즈니는 깊은 침체에 빠져 있었다. 영화와 TV 드라마를 보는 소비자들의 행태가 바뀌고 있었지만 이에 쉽사리 대응하지 못하면서 위기가 왔다. 과거엔 유료 채널을 통해 영화와 드라마를 보던 시청자들이 스마트폰으로 스트리밍 서비스를 즐기게 됐다.
아이거 회장은 이런 시장의 변화를 지켜봤고 변화해야 한다는 걸 절감했다. 아이거 회장은 한 언론 인터뷰에서 “미디어산업이 소비자를 직접 만나는 비즈니스로 바뀌고 있다”며 “기업이 발전하려면 구태의연한 생각을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인수합병(M&A)에서 활로를 찾았다. 디즈니만 보지 않고 디즈니 밖에서도 적극적으로 힘을 키울 수 있는 방법을 찾은 셈이다. 아이거 회장은 더 많은 콘텐츠를 보유하면 시장 지배력을 가질 수 있다고 판단했다.
취임 직후인 2006년엔 픽사를 74억달러에 사들였고 2009년엔 마블엔터테인먼트를 40억달러에 인수했다. 스타워즈 시리즈를 만든 영화제작사인 루카스필름도 품었다. 이들을 한데 모으자 디즈니 콘텐츠 경쟁력은 획기적으로 높아졌다. 매너리즘에 빠진 디즈니는 이들과의 M&A를 통해 깨어났다. 최근엔 21세기폭스의 스튜디오 및 TV 채널 부문 인수를 마쳤다.
아이거 회장은 외부 수혈에만 그치지 않고 디즈니가 가진 창의성과 잠재력을 살리는 데도 힘썼다. ‘겨울왕국’과 ‘미녀와 야수’ ‘주토피아’ 등의 성공은 디즈니의 명성을 재확인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디즈니는 최근 2027년까지 내놓을 주요 영화 라인업을 발표했다. 가장 주목을 끈 작품은 2009년 개봉해 역대 전 세계 극장 수익 1위를 기록한 ‘아바타’였다. 디즈니는 2021년 아바타2를 시작으로 시리즈를 5편까지 제작할 계획이다.
스트리밍 시장 판도 바꿀까
아이거 회장의 눈은 콘텐츠 유통시장을 향하고 있다. 2017년 스트리밍 기술업체인 BAM테크를 인수하면서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시장 진출에 시동을 걸었다. 작년 4월 ‘ESPN+’를 출시하면서 본격 진출했다. 오는 11월 자체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 ‘디즈니+’를 시작하며 세계 최대 스트리밍 업체 넷플릭스와의 경쟁을 예고하고 있다.
넷플릭스보다 구독료를 최대 절반가량 낮게 책정했다. 미국 출시를 시작으로 2021년까지 북미, 유럽, 아시아태평양 등 세계로 서비스를 확장할 계획이다. 2024년 말까지 6000만∼9000만 명의 가입자를 확보하겠다는 목표도 제시했다.
디즈니가 가진 막대한 콘텐츠에 독자적인 스트리밍 서비스까지 구축하면 제작부터 유통까지 한번에 디즈니 손에 들어온다. 디즈니+는 디즈니가 보유하고 있는 영화 500편, TV 시리즈 7500여 편을 제공할 계획이다. 올해 개봉작도 디즈니+에서 독점 서비스할 예정이다.
디즈니는 이외에도 오리지널 콘텐츠 제작을 위해 내년 10억달러를 투자하고, 2024년께 이를 20억달러로 늘리겠다고 했다. 넷플릭스가 선점한 스트리밍 시장 판도를 디즈니가 갈아엎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취임 후 주가 7배 뛰어…연봉도 ‘킹’
아이거 회장의 재임 기간 디즈니 기업가치는 10배 이상 뛰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아이거 회장이 CEO에 올랐을 때 20달러 수준이던 주가가 올해 디즈니+를 발표한 직후 130달러를 넘어섰다”며 그의 업적을 숫자로 표현했다.
이런 실적은 네 번의 연임으로 이어질 전망이다. 아이거 회장은 앞서 은퇴 계획을 몇 차례 밝혔지만 모두 연기됐다. 올해 7월 그의 3연임 임기가 끝나지만 2021년으로 다시 연장됐다. 스트리밍 서비스를 안착시키고 물러나기 위해서다. 디즈니 내부에서도 그를 대체할 인물이 아직 없다는 평가다.
아이거 회장은 연봉을 많이 받는 것으로도 화제가 됐다. 지난해 급여와 보너스, 주식 배당 등을 합쳐 6600만달러(약 750억원)를 디즈니로부터 받았다. 이는 S&P500지수에 포함된 주요 기업 가운데서도 최고액이다.
디즈니 상속녀인 에비게일 디즈니가 이를 두고 “미쳤다”며 “평균 근로자의 500배 임금을 받는 게 말이 안 된다”며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디즈니는 아이거 회장의 보수가 성과에 맞게 지급된 것이란 입장을 내놨다.
설지연 기자 sjy@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