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형규 기자 ] “혹시 ‘한은사(韓銀寺)’라는 절 이름을 들어봤습니까?” 지난해 10월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의 한국은행 국정감사에서 박명재 자유한국당 의원이 이주열 한은 총재에게 건넨 말이다. ‘한은사’란 절이 진짜 있는 건 아니고, 한은이 절간처럼 조용하고 존재감이 없다는 뜻에서 1990년대 언론이 붙여준 별명이다.
20여 년 전 회자됐던 별명을 박 의원이 끄집어낸 것은 “한은이 박사만 145명으로 한국개발연구원(KDI) 80명의 약 두 배인데 경제현안에 제 목소리를 내는 때가 드물고 발간 보고서도 두루뭉술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날 국감에선 ‘척척사’라는 별명도 등장했다. 유승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정부의 최경환 전 부총리가 이 총재와의 관계를 “척 하면 척”이라고 했던 것을 빗댄 것이다.
한은이 ‘재무부 남대문출장소’라는 오명을 듣던 시절, ‘한은 독립’ 하면 일제 때 독립운동처럼 비장했다. 하지만 1998년 한은법으로 ‘중립성’이 보장된 뒤에도 ‘한은사’ ‘척척사’라는 비판이 나온다.
전직 한은 임원은 그 이유로 특유의 몸사리기를 꼽았다. “내부적으로 현안 연구를 많이 하지만 밖으로 안 나간다. 역대 총재들도 대개 그랬고, 연임한 이 총재는 더 자제하는 분위기다.” 전임 김중수 총재가 “한은도 정부”라고 해 한은 내부에서 경악했지만, 지레 조심하느라 연구주제와 보고서의 ‘예각’을 깎는 습성이 몸에 밴 탓도 있다. 사실 경제 운용의 한 축을 담당하는 한은으로선 현안 비판이 ‘누워 침뱉기’로 비칠 수 있는 점도 감안했을 것이다.
그럴수록 정부 산하 KDI의 ‘소신 연구’가 돋보인다. 과거엔 KDI도 정·관·학계 진출을 위한 ‘경력관리 정거장’이란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요즘 KDI는 청와대가 ‘경제가 좋다’고 해도 정책 부작용과 경기 부진을 경고하고, 단기부양식 재정 확대의 위험성을 지적한다. 진보성향인 최정표 원장 부임 후 더욱 할 말을 한다는 점도 흥미롭다.
양대 싱크탱크인 KDI와 한은의 다른 행보는 수장의 성향과 연구풍토에 기인한다는 게 안팎의 분석이다. KDI는 보고서를 발표하기 전에 내부게시판에 올려 혹독하게 검증받는 ‘레프리 제도’가 있다. 반면 한은은 실무진의 보고서가 층층시하인 결재과정을 거치며 상급자 서랍에 들어가기 일쑤다.
민간 경제연구소들이 입을 닫고, 금융권 연구소들이 정부 금융정책에 ‘용비어천가’를 부르는 게 현실이다. 지식인들이 진실을 말하지 않고, 싱크탱크가 지식을 생산해 공개하지 않는 나라가 정상일 수 없다. 이런 때일수록 소금처럼 짠맛이 살아 있는 KDI의 연구보고서가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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