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 문화가 우리의 미래야"…CJ 이재현 회장이 털어놓은 1995년 '그날'

입력 2019-05-31 10:49   수정 2019-05-31 11:01


1995년 3월 이재현 CJ 회장(사진·당시 제일제당 상무)은 누나인 이미경 CJ 부회장(당시 이사)과 함께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영화감독이자 제작자인 스티븐 스필버그, 월트디즈니 만화영화를 총지휘했던 제프리 카젠버그, 음반업계의 거장 데이비드 게펜이 함께 세운 '드림웍스SKG'에 투자하는 계약을 성사시키러 떠나는 길이었다.

그때까지 CJ는 국내 소비자들에게 설탕과 밀가루를 만드는 식품회사로 인식됐다. 이재현 회장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CJ 사업에도 변화가 필요함을 감지했다. 할리우드 거물들과 협상을 앞두고 이재현 회장은 옆에 있던 누나 이미경 부회장에게 말했다. "이제는 문화야. 그게 우리의 미래야. 단순히 영화나 유통에 그치지 않고 멀티플렉스도 짓고, 영화도 직접 만들고, 음악도 하고, 케이블채널도 만들 거야. 아시아의 할리우드가 되자는 거지."

드림웍스SKG를 통해 콘텐츠 제작과 유통 역량을 키운 뒤 궁극적으로 국내 정서에 맞는 콘텐츠를 직접 제작하겠다는 꿈, 멀티플렉스를 통해 영화 관람 문화를 바꾸겠다는 목표, 문화상품을 앞세워 세계시장에 진출하겠다는 계획을 조심스럽게 털어놓은 것이다.

드림웍스 투자는 이후 CJ그룹이 식품회사라는 오랜 틀을 벗어 던지고 문화기업으로 탈바꿈하는 사업다각화의 초석이 됐다. 제일제당은 3억달러(3500억원)을 투자해 드림웍스SKG의 대주주가 됐다. 3억달러는 당시 제일제당 연매출의 20%가 넘는 규모였다. 제일제당은 드림웍스 투자를 통해 배당금 외에 아시아 지역(일본 제외)의 판권을 보유하게 됐다.

또 영화배급, 마케팅, 재무 관리 등 할리우드의 운영 노하우를 지원받기로 합의했다. 한국의 작은 식품회사 제일제당이 할리우드의 최고 '핫 아이콘'인 드림웍스와 손을 잡은 것은 당시 세계의 주목을 끌었다. 이 회장은 1995년 4월 드림웍스 투자를 발표한 뒤, 그 해 8월 제일제당 내 '멀티미디어사업부'를 신설,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국내 최초 멀티플렉스의 탄생

국내 영화산업에 투자를 지속하던 CJ는 1998년 4월 국내 최초 멀티플렉스 극장인 'CGV강변11'을 오픈, 영화산업의 일대 전환기를 불러왔다.

CJ가 처음 멀티플렉스 설립을 검토하기 시작한 것은 드림웍스 투자를 결정한 시점이다. 국내 영화산업의 성장을 위해서는 멀티플렉스가 필수적이라고 판단했다는 설명이다.

그러던 중 외환위기가 발생해 영화사업에 진출해 있던 다른 기업들이 잇따라 철수했다. 영화산업에 몰리던 대기업 산하 벤처투자사들도 대부분 돈을 거둬들였다. CJ그룹 안팎에서도 반대와 우려의 목소리가 커졌지만 이 회장은 국내 최초 멀티플렉스 건설을 밀어부쳤다.

CGV강변11은 개관 첫 해 관객 수만 350만명에 달했다. 객석 점유율도 평일 38~41%, 주말 77~80%로 당시 서울 시내 개봉관의 평균 객석 점유율이 평일 15%, 주말 45% 안팎이었던 것과 비교해 2배 이상 앞서는 점유율을 기록했다.

어둡고 침침한 공간, 불편한 좌석 등으로 기억됐던 기존 극장과 달리 CGV는 고급스러운 카펫과 인테리어, 다수의 스크린과 외식 공간 등을 갖춰 새로운 형태의 문화공간을 선보였다. CJ는 CGV를 본격적으로 확장함으로써 영화 관객의 폭발적인 증가를 이끌었고, 이는 한국 영화 산업 발전의 기폭제가 됐다는 설명이다.

CJ가 탄탄대로만 걸은 것은 아니다. 1997년 100억원대의 제작비를 투입한 영화 '인샬라'는 사하라 사막 현지 제작(올로케이션), 남북 분단 현실의 극복 의지 등을 담아냈으나 5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는데 그쳤다. 이후 제작된 작품들도 새로운 형식, 독특한 내용으로 작품성은 인정받았으나 흥행에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문화사업은 미래형 산업이라는 경영진의 확고한 의지로 투자가 계속됐다. 이렇게 탄생한 '해피엔드'와 '섬', '춘향뎐' 등이 성과를 냈다. 2000년에 만들어진 '공동경비구역 JSA'는 250만 관객(서울관객 기준)을 넘어섰고 드림웍스의 '글래디에이터'와 '아메리칸 뷰티'도 흥행에 성공하며 CJ의 영화사업은 국내 흥행은 물론 외국 영화 배급 흥행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뒀다.

◆방송 미디어와 미디어 플랫폼 사업 본격화


CJ는 영화에 이어 1990년대 후반 케이블방송 사업에도 진출했다. 1997년 음악전문 방송채널인 Mnet을 인수하면서 미디어와 음악제작으로 영역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당시 케이블TV업계는 극심한 불황기였고 방송채널사용사업(PP) 중 흑자를 낸 곳은 39쇼핑이 유일했다. Mnet 인수 후 프로그램이 상당수 개선되고 24시간 실시간 인터넷 방송이 시작됐다. 1999년 1월에는 세계적 음악 전문 채널 MTV네트워크아시아와 전략적 제휴를 체결, 국내 가요의 세계 시장 진출을 추진했다.

1999년 연말 치러진 'Mnet영상음악대상'은 지상파의 연말 음악방송과 달리 베스트 뮤직비디오, 록 밴드, 힙합 등에 대한 시상을 진행해 화제를 낳았다. 이후 MKMF를 거쳐 MAMA가 아시아 최고의 음악축제로 자리잡으면서, Mnet은 K-POP의 글로벌 열풍에 큰 역할을 해냈다는 평을 받았다.

Mnet 외에도 푸드채널인 '채널F'를 2000년에 개국했다. 멀티플렉스 극장 브랜드인 CGV를 채널명으로 사용한 영화채널 '홈CGV'도 이후 개국해 음악, 영화, 요리 등 다양한 문화장르를 보유한 복수채널사용사업자(MPP)의 발판을 마련했다.

2002년 CJ미디어를 설립, 시청타깃과 특성이 명확한 전문채널들을 잇따라 열었으며 2010년 온미디어를 인수, 현재는 영화, 푸드스타일, 바둑, 어린이, 패션스타일 등 각기 명확한 타겟 시청층을 보유한 총 18개의 다양한 전문 채널들을 운영하고 있다.

CJ E&M이 2012년 시작한 케이콘(KCON)은 콘서트를 매개로 한류 콘텐츠와 국내 대기업 및 중소기업의 제품을 체험하는 컨벤션을 융합, 한국의 종합적인 브랜드 체험을 제공한다. 한류의 낙수효과를 경험하고 인정한 기업들이 문화 콘텐츠와 결합된 컨벤션에 적극적으로 나서며 참여기업들도 매년 1.5~2배 증가하고 있다.

2013년 10월 방한했던 드림웍스 CEO 제프리 카젠버그는 CJ가 20년도 안돼 식품회사에서 문화콘텐츠 기업으로 성장한 모습에 놀람을 표한 것으로 유명하다. 짧은 기간 동안 방송, 영화, 음악, 공연 등의 사업을 하는 엔터테인먼트 미디어 그룹과 식품서비스, 유통 등의 라이프스타일 기업이 결합해 시너지를 내는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구축했다는 것이다.

이재현 CJ 회장은 "전 세계인이 매년 2~3편의 한국 영화를 보고, 매월 1~2번 한국 음식을 먹고, 매주 1~2편의 한국 드라마를 시청하고, 매일 1~2곡의 한국 음악을 들으며 일상 생활 속에서 한국 문화를 마음껏 즐기게 하는 것이 CJ의 목표"라고 강조했다.

노정동 한경닷컴 기자 dong2@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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