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불신, 중국의 경멸 동시에 초래
보복 두려워 말고 '국제법 지지' 선언해야
복거일 < 사회평론가·소설가 >
지금 우리나라는 불안하다. 경제도, 안보도 위험하고 사회적 분열도 깊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위험이 닥친 분야가 외교다. 외교는 다른 분야보다 상황이 빠르게 바뀌기 때문에 대응이 조금만 늦어도 실기한다.
미국과 중국의 대결은 우리의 외교 환경을 아주 위험하게 만들었다. 두 나라가 매사에 자기 편에 서라고 한국에 요구한다. 이론적으로는 중립이 좋겠지만, 약소국이 중립을 지키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당장 심각한 문제는 남중국해 분쟁이다. 미국과 중국의 군사적 충돌을 부를 수 있는 일이라 우리로선 특히 곤혹스럽다. 남중국해는 여러 나라로 둘러싸인 좁은 바다인데, 중국이 그곳의 섬들을 영유한 적이 있다면서 바다의 대부분을 자기 영해라고 주장한다. 참다못한 필리핀이 2014년 헤이그 상설중재재판소(PCA)에 이 분쟁을 제소했다.
2016년 PCA는 ①남중국해의 섬들에 대한 역사적 권리가 있다는 중국의 주장은 근거가 없고 ②분쟁 해역은 필리핀의 배타적 경제수역에 속하고 ③그곳에서 중국은 필리핀의 주권을 침해했고 ④중국의 군사기지 건설과 파괴적 어업은 해양 환경을 크게 훼손했다고 판정했다.
자신의 주장이 근거가 약하다는 것을 잘 아는 중국은 PCA 판결이 나오기 전부터 불복할 뜻을 비쳤다. 미국은 ‘당사국들이 판결을 존중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한국에도 동참을 요청했다. 그러나 한국은 “판결이 나오기 전에 태도를 밝히는 것은 어렵다”고 거절했다. 이런 태도는 비논리적이었다. 판결을 존중하라는 권유는 판결이 나오기 전에 해야 공정하고 효과가 크고 반발도 덜하다.
첫 고비에서 비겁하고 어리석은 선택을 했으니, 한국으로선 사태가 진행될수록 옳은 선택을 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판결이 나온 뒤 미국과 일본은 중국의 불복을 비판했지만, 한국은 동참하지 못했다. ‘외교부 대변인 성명’으로 “분쟁이 평화적이고 창의적인 외교 노력을 통해 해결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모든 외교적 노력이 실패해서 PCA의 중재를 요청했는데, 무슨 ‘외교 노력’ 타령인가? 중국이 자신의 힘을 과시하면서 어떤 대화도 거부하는데, 무슨 “평화적이고 창의적인 외교 노력”이 가능하단 얘긴가? 이런 행태는 중립적이 아니라 중국을 두둔한 것이었다. 그래서 미국의 불신과 중국의 경멸을 함께 샀다. 중국이 사드(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배치를 트집 잡은 것은 그런 경멸에서 비롯한 부분이 크다.
그 뒤로 미국은 남중국해가 공해라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전함들을 분쟁 해역으로 보냈다. 한국은 이런 노력을 줄곧 외면했다. 이제 미국은 남중국해 문제에서 자신의 입장을 따르라고 한국에 강력히 요구한다.
우리는 당연히 미국 진영에 서야 한다. 미국이 우리의 안전을 궁극적으로 보장하는 동맹국이란 사정 때문만은 아니다. 국제기구의 판결이 강대국에 의해 가볍게 무시된다면 세계 질서는 허물어지고, 그런 상태에서 큰 손해를 보는 것은 우리 같은 약소국이다. 우리도 중국과 이어도 부근 해역의 영유권을 놓고 다투는 처지다. 국제법에 따르면 이어도 해역은 우리 영해인데, 중국은 자기 해역이라고 강변한다. 우리가 중국에 국제법을 지키라고 요구하는 진영에 가담하지도 못한다면, 어떻게 혼자서 영해를 지킬 수 있겠는가?
국제법을 지지하는 선택은 빠를수록 그리고 분명할수록 좋다. 사드의 경험이 보여주듯, 보복을 두려워해서 머뭇거리는 태도는 최악의 선택이다. 우리의 대(對)중국 외교는 중국이 우리를 얕보도록 만든 역대 정권의 실책들을 반성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사드의 경우 야당 대표 시절에 한반도 배치를 반대했던 터라 문재인 대통령으로선 중국에 보복 중단을 요구하는 데 논리적으로 약했을 것이다. 그러나 남중국해 문제에서 어리석은 선택을 한 것은 박근혜 대통령이었으므로 논리적으로 약할 이유가 없다. 국제법을 지키라고 중국에 요구하는 자유주의 국가의 대열에 합류하는 것은 우방들과의 연대를 튼튼히 하고 실패한 대중국 외교를 일으켜 세우는 계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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