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인터뷰
개혁에는 혁명보다 진화가 적합…원샷 개혁은 필패
대기업 세분화 필요…집중감시 대상 5대그룹이면 충분
[ 이태훈/오상헌 기자 ]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은 문재인 대통령이 가장 먼저 지명한 장관급 후보자였다. 20여 년간 시민운동을 하며 ‘재벌 저격수’란 별명을 얻은 김 위원장이 경제부총리보다 먼저 지명되자 “재벌개혁이 새 정부의 최우선 경제정책이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경영계를 중심으로 나왔다. 하지만 요즘 김 위원장은 재계보다는 시민단체와 진보학계에서 더 많은 공격을 받고 있다. ‘김상조식 재벌개혁’이 기대에 비해 약하고 느리다는 이유에서다. 오는 13일 취임 2주년을 맞는 김 위원장을 지난 7일 서울 세종대로 한국공정거래조정원에서 만났다. 그는 “진보진영 학자들은 여전히 ‘강력한 사전규제로 재벌을 몰아붙여야 한다’는 30여 년 전 사고에 사로잡혀 있다”며 “시대가 바뀐 만큼 (기업들이 자유롭게 사업할 수 있도록) 사전규제는 완화하되 (범법 행위에 대한) 사후감독을 강화하는 식으로 경쟁당국의 정책도 변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이어 “올 하반기에 대기업을 겨냥한 신규 조사는 최소화할 것”이라며 “2017년 12월 시작한 미래에셋그룹의 일감 몰아주기 의혹 조사도 2~3개월 내 마무리짓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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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설문조사를 보면 정부의 3대 경제정책(소득주도성장, 혁신성장, 공정경제) 중 공정경제가 가장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글쎄요. 재계는 괜찮게 평가하는데 오히려 시민단체가 부정적으로 보는 것 같습니다. 재벌개혁의 속도가 너무 느리다는 것이겠죠. 하지만 저는 개혁은 ‘원샷’에 될 수 없다고 믿습니다. 한 번에 모든 걸 바꾸려는 개혁은 실패할 수밖에 없어요. 저는 목표를 ‘레볼루션(혁명)’이 아니라 ‘에볼루션(진화)’으로 풀려는 진보 학자입니다.”
▷대기업은 여전히 공정위를 무서워합니다.
“그래서 가이드라인을 주는 겁니다. 공정위가 사건을 어떤 식으로 처리하는지를 보면 기업이 예측할 수 있고 준비할 수 있잖아요. 기업으로선 공정위가 과거에 안하던 일을 하니 거칠다고 느끼겠죠. 하지만 최소한 ‘김상조가 어떤 방향으로 간다’는 건 예측할 수 있을 겁니다.”
▷시민단체는 어떤 점에서 ‘김상조식 개혁’이 더디다고 하는 겁니까.
“진보진영 학자들이나 시민단체 중에는 30여 년 전 생각을 그대로 유지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헌법 119조 2항인 경제민주화 조항이 만들어진 1987년 기준으로 2019년을 보는 거죠. 당시에는 정부가 사전규제를 통해 기업을 몰아붙이는 게 효과적인 방법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한국 경제와 세계 경제가 그동안 얼마나 바뀌었습니까. 지금은 사전규제보다는 사후감독이 더 중요한데…. 아직도 30년 전 사고에 사로잡혀 있는 분들이 대한민국의 미래에 얼마나 기여하고 있는지 되묻고 싶습니다.”
▷사전규제를 완화한다면 무엇부터 가능할까요.
“경제력 집중 억제 대상을 세분화하는 겁니다. 외환위기 전까지는 30대 그룹을 지정해 똑같은 잣대로 규제해도 별문제가 없었죠. 하지만 지금은 대기업이라고 다 같은 대기업이 아니에요. 5대 그룹과 나머지 대기업 그룹은 규모나 회사 운영방식에서 큰 차이가 납니다. 지금은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자산총액 10조원 이상)과 공시대상기업집단(자산총액 5조원 이상) 2개로만 나눴는데, 이걸 3~4개로 세분화할 수 있을 겁니다. 그야말로 경제력이 집중된 5대 그룹만 관리·감독하고 나머지 그룹은 시장에 정보를 공개하는 수준으로 감독 수준을 완화하자는 거죠. 다만 당장은 어렵습니다. 다중대표소송제, 전자투표제 등이 제대로 도입·작동하면 생각해볼 수 있는 문제입니다.”
▷벤처기업에 한해 차등의결권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냈습니다.
“벤처기업 창업자가 경영권을 잃을 걱정 없이 회사를 키우는 데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자금력이 달리는 청년 사업자가 회사를 키우려면 외부 자금을 조달받아야 하고, 그럴 때마다 지분율이 떨어지기 때문이죠. 벤처 창업가의 지분에 대해서만 차등의결권을 주면 이런 문제는 해결됩니다. 하지만 상장 대기업으로 확대하는 건 반대합니다. 차등의결권이 경영권 방어 수단이 돼선 안되기 때문이죠. 상장기업에 차등의결권을 허용하면 ‘주주평등의 원칙’ 위반으로 위헌 판결이 나올 걸요?”
▷재계는 공정위 조사기간이 너무 길다고 불만입니다.
“공정위에 기업집단국이 설립(2017년 9월)되기 전에는 사건 처리에 3~4년이 걸렸습니다. 지금은 2년 미만으로 줄었어요. 기업들에 ‘조사 불확실성’을 줄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삼성 계열 급식업체인 웰스토리 등 작년에 시행한 10개 기업의 일감 몰아주기 조사도 가능한 연내, 늦어도 내년까지는 마무리지을 생각입니다. 기존 조사 사건 마무리에 역량을 집중할 계획인 만큼 올해 신규 착수 건수는 작년보다 줄어들 겁니다.”
▷미래에셋그룹에 대한 일감 몰아주기 조사는 언제 끝납니까.
“2~3개월 내 심사보고서를 완성해 전원회의에 올릴 계획입니다. (공정위는 ‘미래에셋 계열사들이 박현주 회장 일가가 지분 91.9%를 보유한 미래에셋컨설팅에 일감을 몰아준 의혹이 있다’는 금융감독원 제보에 따라 2017년 12월 조사에 들어갔다. 이로 인해 미래에셋대우는 초대형 투자은행(IB) 자격 요건을 갖췄음에도 발행어음사업(단기금융업)을 못 하고 있다. 미래에셋이 무혐의 판정을 받으면 한국투자증권 NH투자증권 KB증권에 이어 네 번째로 발행어음사업에 뛰어들 것으로 업계는 전망하고 있다.)”
▷공정위가 최근 넷플릭스 등을 들여다보고 있는데요.
“플랫폼 경제는 경쟁당국에 새로운 도전과제를 안겨줬습니다. 넷플릭스 유튜브 등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가 그렇습니다. 이들 업체가 기존 방송시장을 갉아먹고 있지만 시장 획정에 대한 명확한 답은 아직 없어요. OTT의 시장장악력이 커지고 있는 점을 감안해 불공정 행위 여부에 대한 조사도 강화하고 있습니다. 지난 3일부터 넷플릭스에 대한 불공정 약관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공정위는 이미 페이스북 구글 등 글로벌 기업들의 불공정 약관에 대해 지적했고, 이들 모두 수용했습니다.”
▷국내 업체가 해외 업체에 역차별당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그런 측면이 있어요. 네이버 카카오 등 국내 업체들은 국내 통신업체에 인터넷 망 사용료를 내지만 넷플릭스 유튜브 등은 거의 안 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해외 업체와 달리 국내 플랫폼 업체들만 국내 규제를 적용받는 문제도 있죠.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방송통신위원회와 수시로 대화하고 있습니다. 우리 기업들이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뒤처지지 않도록 규제를 보완해 나가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흔히 ‘총수’로 불리는 대기업집단 동일인 지정제도 개선 필요성을 언급했습니다.
“지금은 상당수 대기업의 경영권이 2~3세에서 3~4세로 넘어가는 변곡점입니다. 단순한 동일인 변경이 아니라 새 시대의 시작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앞으로 동일인 지정은 기업이 원하는 것을 최대한 반영하는 쪽으로 바꿔나갈 생각입니다. 지금까지는 경영권이 아버지에게서 자식으로 넘어가도 아버지가 살아있는 한 동일인을 안 바꿔줬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럴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실제 경영권이 넘어갔다면 동일인도 바꾸는 게 순리잖아요.”
▷정부의 과보호가 중소기업 경쟁력을 떨어뜨린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정부가 경쟁을 막는 바람에 중소기업의 실력이 떨어진 측면이 있습니다.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중소기업 지원금 규모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많습니다. 중소기업 지원정책도 구조조정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살아남은 중소기업의 경쟁력이 더욱 커집니다. 문제는 한국의 내수시장이 작은 탓에 어느 분야든 대기업 1~2개만 들어오면 시장이 포화된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정부로선 중소기업을 보호할 수밖에 없죠. 궁극적으로 중소기업이 경쟁력을 갖추려면 해외로 나가야 합니다. 국내 대기업뿐 아니라 글로벌 기업에도 납품할 수 있는 경쟁력을 갖춰야 합니다.”
■취임 2년 소회는…
"부처 간 협업 어려움 실감"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은 취임 2주년을 맞는 소회를 묻자 “민간에 비해 정부의 일처리가 느리고, 부처 간 협업이 어렵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시행규칙 하나를 바꾸는 데도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여기저기 사인을 받느라 몇 개월이 걸린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공무원 조직은 성과평가가 어렵고 보상해줄 방법도 마땅치 않다 보니 협업이 잘될 리가 없다”며 “이러다 보니 국민이 체감하는 성과를 내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보수, 진보라는 이념 문제를 넘어 우리가 풀어야 할 과제”라며 “이를 해결하지 못하면 선거에서 어느 진영이 이겨도 똑같이 실패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약력
△1962년 경북 구미 출생
△서울 대일고,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한성대 무역학과 교수
△노사정위원회 경제개혁소위원회 책임전문위원
△재정경제원 금융산업발전심의회 위원
△영국 케임브리지대 경제학과 초빙교수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 소장
△경제개혁연대 소장
이태훈/오상헌 기자 bej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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