檢, 김기춘 블랙리스트(4년형), 화이트리스트(1년6개월) 이어 세번째 기소
"실시간의 개념은", "공문서 맞나" 등 지엽적인 논란만 남겨
(안대규 지식사회부 기자) 검찰은 지난 4일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에 대해 허위공문서 작성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을 구형했습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30부(재판장 권희) 심리로 열린 마지막 공판에서 검찰은 “이 사건은 한마디로 ‘대국민 사기극’으로 박근혜 정부 청와대의 과오, 무능, 부실대응, 늑장대응을 은폐하기 위해 국민을 속였다”고 말했습니다.
검찰은 2017년 김 전 실장에 대해 문화·예술계 지원 배제(블랙리스트) 혐의와 보수단체 부당 지원(화이트리스트) 혐의로 각각 기소했습니다 .김 전 실장은 블랙리스트 혐의로 징역 4년, 화이트리스트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 받은 상태입니다. 이번이 김 전 실장에 대한 검찰의 세번째 기소입니다.
법조계에선 앞서 블랙리스트, 화이트리스트 혐의에 대해선 대체로 인정하는 분위기이지만 이번 기소만큼은 법리적으로 많은 문제가 있다는 데 한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이번 사건은 2017년 10월 12일 당시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이 세월호 보고일지가 사후 조작됐다며 검찰에 수사의뢰하겠다고 발표한 것이 발단이 됐습니다. 2014년 4월 세월호 사건 당시 대통령에 대한 위기관리센터의 최초 상황보고는 오전 9시30분 경에 이뤄졌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의 최초 지시 시점(오전 10시15분)과 시간 차이가 많이 나서 임의로 보고 시간을 오전 10시로 바꿨다는 것입니다. 검찰은 즉각 수사에 착수했습니다.
하지만 검찰 수사 결과 당시 임종석 실장의 주장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났습니다. 청와대내 보고자가 보고서를 작성하기 시작한 최초 시간을 표시한 문서를 두고 청와대가 대통령에 보고한 시간으로 오해한 데서 비롯된 것이죠.
검찰 공소장에도 이 내용은 빠져 있습니다. 검찰은 대신 오전 10시 보고한 것이 아니라 보고자의 관저내 이동시간을 고려한다면 대통령이 실제 보고를 듣게 된 시점은 몇 분간 차이가 발생한다며 이를 ‘허위 공문서 작성’이라고 기소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 대부분 언론이 ‘세월호 보고 시간 조작 의혹’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데, 이제 더 이상 보고시간 조작이 주요한 쟁점은 아니게 된 것이죠.
검찰은 또 청와대 캐비넷에서 확보한 A4지 한 장 분량의 ‘국회 예상 질의응답 자료’에서 실시간으로 대통령에 보고했다는 표현에 대해 문제를 삼고 김 전 실장에 대해 ‘허위공문서 작성 및 행사’혐의를 적용했습니다.
실제 서류에는 “사고 당일 대통령이 위기관리센터를 방문하지 않은 이유”라는 질의에 대해 “안보실, 비서실에서는 현장에서 올라오는 보고를 바탕으로 실시간으로 상황을 파악해 대통령께 충분히 보고 드렸음(유선 7회, 서면 14회)”이라고 쓰여있습니다.
김 전 실장 변호인측은 재판에서 ‘실시간으로’라는 표현은 ‘상황을 파악해’를 수식할 뿐, ‘보고드렸음’을 수식하는 것은 아니라고 해명했습니다. 하지만 검찰은 다르게 해석했습니다. 검찰은 지난 4일 결심공판에서도 “피고인들의 거짓말로 국민은 청와대 관계자들이 박 전 대통령에게 실시간으로 신속 보고하고, 박 전 대통령은 적시에 필요한 지시를 한 것으로 오인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김 전 실장 변호인측은 ‘국회 예상 질의응답 자료’가 국회에 정식 제출된 자료도 아닌 내부적으로 작성한 문서이기 때문에 공문서라고 볼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허위 공문서 작성 혐의가 적용되지 않는 다는 것이죠. 실제 이 문서엔 제목, 발신처, 수신처, 작성자, 작성기관 등의 표시가 없습니다. 검찰은 이 자료를 김 전 실장이 한번 읽은 바 있다며 최종책임자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실제 이 문건을 작성한 공무원은 기소하지 않았죠.
서울 서초동 한 변호사는 “공문서로서 형식을 전혀 갖추지 않고, 외부로 유출되지도 않은 서류에 대해 검찰이 허위공문서 작성 혐의를 적용하는 것은 무리“라며 “만약 이러한 문건도 공문서라면 우리나라 106만명의 공무원들은 문서를 수정할 때마다 공문서손괴 또는 공문서변조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검찰은 세월호 참사 이후 부좌현 전 의원 요구에 따라 당시 대통령 비서실이 답변한 자료에서 “20~30분 단위로 유·무선으로 대통령에게 보고했다”고 표현한 부분도 허위기재라고 김 전 실장을 기소했습니다.
하지만 김 전 실장측은 “이 문서 작성자가 김 전 실장의 답변을 예상해 임의로 적은 것”이라며 “문건 내용에 대해 김 전 실장도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많다”고 해명했습니다. 또 당시 20~30분 단위로 보고했다는 것은 대통령비서실과 국가안보실의 보고 건수를 합쳐서 추산한 것인데, 검찰은 대통령비서실만의 보고라고 오해한 것이란 분석도 나옵니다.
검찰은 당시 청와대 실세였던 김 전 실장을 잡기위해 세월호 사건 당시 늑장 보고의 책임으로 김 전 실장을 겨눈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당시 청와대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세월호 사고에 대한 대통령 보고는 대통령 비서실이 아닌 국가안보실이 주도했습니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하자마자 국가안보실(실장 김장수)은 당시 박근혜 대통령에게 유선 7회, 무선 3회(상황병이 직접 전달)로 실시간 보고했습니다. 대통령비서실은 국가안보실 보고내용을 토대로 보완하는 내용 위주로 대통령에게 서면으로 11회 보고했습니다.
박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할 수 있는 국가안보실 보고 시스템과 달리 대통령비서실은 박 대통령에게 ‘직보’할 수 있는 여건도 아니었습니다. 대통령비서실에서 대통령에 보고하는 모든 이메일과 서류는 당시 청와대 부속실 정호성 비서관을 거쳐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제왕적 권력’일 것이라고 여겨졌던 청와대 비서실장도 당시 박 대통령에 직접 보고할 수 없고 ‘문고리 3인방’을 거쳐야 했다는 점은 당시 의사결정 시스템의 큰 문제로 지목되고 있습니다.
세월호 사건 당시 대통령비서실에서 실시간으로 보고를 해도 당시 정호성 비서관은 이를 묶어서 취합해 시간차를 두고 보고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정 비서관이 세월호 참사 당시 오전 11시 무렵에 나온 ‘전원 구조’라는 뉴스 오보를 본 것도 보고가 늦어지게 된 계기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청와대가 세월호 보고시간 조작 의혹으로 수사를 의뢰한 이번 사건은 ‘공문서가 맞나’, ‘실시간이라는 표현이 맞나’라는 다소 지엽적인 논란만 남기게 됐습니다.
세월호 참사 당시 청와대와 국가안보실은 미온적으로 대응했다는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이러한 보고를 접하고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책임은 무엇보다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검찰의 공소장에 법리적 구멍이 많이 생긴 것은 ‘청와대 하명 수사의 한계’라는 지적도 나옵니다. 검찰이 국민 여론에만 기댄체 ‘마녀 사냥’식으로 법리를 무리하게 적용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이번 사건에 대한 선고는 다음달 25일로 예정돼 있습니다. 법조계에선 “검찰의 공소장이 너무 허술하다”며 “무죄가 나올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검찰이 청와대가 수사하라고 한 것만 수사하지말고 세월호 참사를 야기시킨 공무원의 ‘보신주의’와 ‘복지부동’ 등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좀 더 날카로운 칼날을 들이댔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끝)/powerzanic@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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