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재길의 경제산책] '안전기준' 없이 ESS 화재 23건…정부 왜 사과 안하나

입력 2019-06-13 09:57   수정 2019-06-13 10:01



이틀 전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에너지저장장치(ESS) 화재 원인 및 대응 방안 기자간담회에선 취재 열기가 어느 때보다 뜨거웠습니다. 단기간 23번이나 화재가 난데다 정부의 재생에너지 확대 정책에도 중대 변수가 될 수 있는 사안이기 때문이죠. 오전 10시에 시작했던 질의응답이 2시간 가까이 이어졌습니다. 화재 사고 조사위원회를 이끈 김정훈 홍익대 전기전자공학부 교수와 최윤석 울산과학기술원(UNIST) 에너지공학부 교수가 기술적인 설명을 많이 했지요.

19명의 전문가로 구성된 조사위는 올 1월부터 5개월 넘게 화재 원인을 분석해 왔습니다. 별도로 인증시험기관 전문인력 90여명에게 의뢰해 총 76차례의 실증 실험도 진행했다고 밝혔습니다.

ESS는 태양광 풍력 등 재생에너지 발전엔 필수 장치입니다. 해가 뜰 때만, 또 바람이 불 때만 전력을 생산할 수 있는 재생에너지 특성 때문에 에너지를 담아두는 별도 설비가 꼭 필요한 겁니다. ‘에너지’로 가득 차 있는 ESS의 경우 화재 발생 후 1분40초면 걷잡을 수 없이 커집니다. 골든 타임이 2분이 채 되지 않는 겁니다. 건물 안에 ESS가 설치됐을 경우 대형 사고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조사위가 밝힌 화재의 주요 배경은 부실한 설치·관리였습니다. 배터리셀 자체의 불량을 일부 확인했지만 “직접적인 화재 원인은 아니다”라는 게 조사위 결론입니다. “일부러 불량품을 만든 뒤 180회 이상 실험했는데도 화재로 이어지지 않았다. 다만 일부 제품이 간접적인 원인이 됐을 수 있다.”고 했지요. 국내산 배터리의 세계시장 점유율이 80%에 달하는 상황에서 ESS 화재가 유독 국내에서만 발생하고 있는 건 배터리셀이 아니라 시스템통합(SI) 등 유지·관리 문제란 뜻입니다. 해외에서 발생한 국내산 배터리셀의 화재 사고는 미국 애리조나주 등 일부에 국한됩니다. 국내 SI업계에 소규모 영세업체가 난립해 있다 보니 이런 문제가 생겼다는 설명입니다.

조사위는 ESS 화재의 원인으로 네 가지를 지목했습니다. △(배터리셀이 아닌) 배터리 보호 시스템의 결함 △수분·먼지 등 관리 미흡 △설치 때 결선 등 부주의 △부품 간 통합관리 부재 등이었지요.

상당수 국민은 재생에너지 발전을 확대하는 데 반대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단기간에 급속히 늘릴 때 생기는 역작용이죠. 어찌 보면 최저임금 인상 문제와 비슷합니다. 최저임금 인상 자체는 자연스러운 경제 현상 또는 정책 방향이지만, 2년간 한꺼번에 30%(주휴수당 포함하면 훨씬 높음) 올리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2016년만 해도 신규로 설치한 ESS는 총 207㎿h였습니다. 정부 지원책이 집중되자 2017년 723㎿h, 작년 3632㎿h로 급증했지요. 2017년 3.5배, 작년 5배씩 각각 뛴 겁니다. 2016년만 해도 74곳에 불과했던 ESS 사업장은 작년 말 947곳으로 약 13배 늘었습니다. 2017년 7.6%이던 재생에너지 비중을 2030년까지 20%로 늘린다는 ‘재생에너지 3020 이행계획’이 큰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ESS가 마구잡이식으로 설치되는 과정에서 ‘기준’이나 ‘표준’이 없었습니다. 재생에너지 발전의 특성상 바닷가나 산지 등에 많이 들어서기 때문에 온도와 습도 조절이 중요한데, ESS에 특화된 안전 기준이 마련되지 않았지요. 대형 화재 사고에 대비하기 위한 옥내외 설치 규정, 방화벽, 이격거리 등 기준도 충분치 않았구요. 23건의 ESS 화재가 일종의 ‘인재’(人災)였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입니다.

ESS 화재 원인 및 대응 방안 기자간담회에서 정부가 이 부분에 대해 사과하거나 유감 표명을 하지 않은 점은 아쉬운 대목입니다. 단기간 수없이 반복됐던 화재를 ‘정책 사고’로 볼 수 있는지, 이에 대한 입장이 무엇인지 질문이 나왔지만 답변을 유보했지요. 이 질문 후 오히려 정부가 “어떤 측면에선 배터리 제조업체가 총괄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발언했던 건, 일종의 책임 떠넘기기로 들릴 소지가 있습니다.

이번 사고 조사위를 이끈 김정훈 위원장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전기나 자동차가 위험하지만 잘만 다루면 유용하지 않나. ESS 분야의 경우 전세계에서 최초로 진행하는 게 많은데, 운영관리나 설치기준 등 제도 자체가 없었던 게 아쉬웠다.”

조재길 기자 road@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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