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조업 활력 떨어져 선진국 추격 제동…기술 부족한 무역대국 '속빈 강정'

입력 2019-06-14 17:29  

이영훈의 한국경제史 3000년
(57) 감속성장의 한국 경제




투자 부진과 높은 대외의존도

1997~1998년의 위기를 맞아 34년을 이어온 고도성장 시대가 막을 내렸다. 이후 한국 경제는 감속성장 시대에 접어들었다. 1999~2000년의 연간 성장률이 10.1%가 나온 것은 위기 이후의 반등 효과 때문이었다. 이후 성장률은 2013~2014년의 3.1%까지 지속적으로 하락했다. 투자 부진이 기본 원인이었다. 1994~1995년 13.5%였던 투자증가율이 2013~2014년 3.2%로 낮아졌다.

위기의 와중에 거의 모든 금융회사가 퇴출 또는 합병 대상이 됐다. 대부분의 은행이 외국인 자본의 지배를 받고 주식시장도 크게 개방됐다. 삼성전자 현대자동차를 비롯한 우량기업의 주식 50% 이상이 외국인 소유로 바뀌었다. 기업과 정부가 투자 위험을 공유하면서 새로운 산업과 시장을 역동적으로 개척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기업은 이윤의 상당 부분을 배당금으로 주주들에게 나눠줬다. 투자는 기업가의 경영권을 위험하게 하지 않는 수준에서 안정성 위주로 관리됐다.


감속 추세지만 성장을 뒷받침한 것은 수출이었다. 수출은 1994년 960억달러에서 2013년 5596억달러로 급증했다. 국민총소득(GNI)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1994~1995년 26%에서 2013~2014년 54%로 높아졌다. GNI 대비 수출입 비중, 곧 대외의존도는 같은 기간 53%에서 103%로 커졌다. 2011년 GNI가 1조달러 이상인 나라는 한국을 포함해 모두 15개국이다. 한국을 제외한 14개국의 대외의존도는 평균 43%였다. 그에 비해 한국은 무려 95%나 됐다. 감속성장의 시대에 한국 경제는 비정상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높은 대외의존 구조로 바뀌었다.

대기업 주도의 불균형 성장

수출의 주력은 전기제품, 자동차, 기계·컴퓨터, 석유·석탄, 선박, 광학기기, 플라스틱 등 중화학공업이었다. 2014년 이들 7대 제품이 전체 수출의 76%를 차지했다. 수출의 주력군은 이들 중화학공업에 종사하는 대기업이었다. 1973년 시작된 중화학공업의 역사는 1990년대 후반에 이르러 소수 대기업이 선진적인 국제경쟁력을 확보하는 커다란 성취를 이뤘다. 반면 다수 중소기업의 국제경쟁력은 후퇴했다. 2013년 중소기업의 수출 비중은 17%에 불과했다. 나머지 83%는 대기업의 수출이었다. 고도성장기 중소기업의 수출 비중은 꾸준히 증가했다. 1995~1996년 중소기업은 수출의 41%를 담당했다. 그것이 2013년까지 17%로 줄었다. 감속성장의 한국 경제는 소수 대기업의 수출에 의존하는 불건전한 구조로 바뀌었다.

수출 중화학공업은 점점 자본집약화, 기술집약화했다. 이에 따라 수출이 증가해도 고용이 그리 늘지 않았다. 나아가 수출산업과 여타 산업의 연관도 점점 약해졌다. 수출의 부가가치유발계수는 수출 수요의 1단위 증가가 국내 다른 산업에서 부가가치를 유발하는 정도의 합을 나타낸다. 1995년 동 부가가치유발계수는 0.698이었다. 그것이 2013년까지 0.541로 하락했다. 이는 수출산업이 원자재, 부품, 기계장치를 해외에서 수입하는 정도가 점점 커졌음을 얘기한다. 수출이 증가해도 고용이 늘지 않은 한편의 원인은 여기에 있었다. 수출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연관은 점점 약화됐다. 중소기업 중에서 수급(受給) 업체 비중은 1998~1999년 66%에서 2010~2011년 44%로 떨어졌다. 수급 업체란 기업 간 거래를 하는 회사를 말한다. 감속성장의 한국 경제는 수출 중화학공업의 소수 대기업만 잘나가는 불균형의 구조로 바뀌었다.


대일 의존 심화

위기 이후 한국의 무역수지는 큰 폭의 흑자로 돌아섰다. 해마다 진폭이 크지만 흑자 규모는 연간 200억~400억달러에 달했다. 만성적 적자에 시달리던 이전 시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규모의 흑자였다. 국제 경제 여건 변화에 따라 수출 중화학공업의 경쟁력이 크게 강화된 덕분이었다. 감속성장 추세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은 무역수지의 흑자에 안도하는 가운데 나라가 선진국 대열에 진입했다는 ‘환상’을 품었다. 일본과의 무역수지는 큰 폭의 적자였다. 굳이 환상이라고 표현한 것은 정부나 국민이나 그에 대한 경계심이 엷어졌다는 점을 지적하기 위해서다.

대폭의 흑자는 대폭의 대일(對日) 적자에 기초한 것이었다. 예컨대 2010년 한국의 무역수지는 412억달러 흑자였다. 반면 대일 적자는 319억달러였다. 다시 말해 한국은 세계의 다른 모든 나라를 상대로 731억달러의 흑자를 본 다음, 그중 319억달러를 일본에 지급한 셈이었다.

위기 이후 고도성장기를 관철한 ‘자립적 국가 경제의 건설’이란 목표가 사라졌다. 그를 위한 산업정책 또는 무역정책이 모두 포기됐다. 수출 대기업은 원자재, 부품, 기계장치를 국내 기업과의 협력에서 확보하기보다 손쉽게 일본에서 수입하기 시작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보다 기술력이 떨어지는 중국, 동남아시아, 인도, 동유럽의 신흥시장이 활짝 열렸다. 대폭적인 무역수지 흑자는 한국 수출산업의 경쟁력이 거둔 과실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세계 시장의 구조 변화와 더불어 일본이란 기술 대국을 바로 옆에 두고 있는 ‘지경학적(geo-economic) 비교우위’가 안겨준 과실이기도 했다.

과실의 달콤함에 취해 얼마나 큰 비용을 치렀는지 주의를 소홀히 해선 곤란하다. 앞서 서술한 대로 국가 경제의 자립도는 현저히 약화됐으며 산업 간 또는 기업 간 불균형이 심화했다. 2009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회원 34개국의 수출부가가치율을 발표했다. 앞서 소개한 수출 부가가치유발계수와 같은 개념의 지표다. 한국의 수출부가가치율은 꼴찌에서 네 번째였다. 한국은 비록 무역 대국이지만, 기술력 부족으로 실속이 없었다는 얘기다. 마치 속 빈 강정과 같은 꼴이었다. 위기 이후의 한국 경제사는 성장 중인 어느 후진 경제가 ‘자립적 국가 경제의 건설’이란 장기 목표를 포기하고 자유시장과 자유무역에 몸을 맡길 경우 국가 경제에 어떤 주름이 발생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추격의 중단

어느 기업 또는 국가가 성장을 거듭해 선발 기업 및 국가를 따라잡는 것을 흔히 ‘추격(catch-up)’이라 한다. 추격에는 간격을 좁히는 수렴과 아예 넘어버리는 추월의 두 가지가 있다. 성공적인 추격을 위해서는 뭔가 특별한 노력이 필요하다. 선발자가 걸은 길을 열심히 뒤쫓아가서는 곤란하다. 그래서는 약간의 수렴이 가능할지 모르나 더는 허락되지 않는다. 후발자는 선발자가 밟았던 여러 단계의 하나를 생략하거나, 아예 다른 경로를 개척할 필요가 있다. 그 경우 후발자는 선발자를 추월할 수도 있다.

이런 일은 매우 예외적인 사례에만 발생한다. 화학공업, 금속·기계공업처럼 장기간의 시행착오를 거쳐 기술과 숙련이 암묵적 형태로 축적되는 산업에서 후발자의 추격은 매우 힘들며 추월은 거의 불가능하다. 반면 전기·전자공업처럼 기술수명이 짧고 기술체제가 명시적이어서 표준화하기 쉬운 산업에서 후발자는 대규모 연구개발 투자를 통해 선발자가 밟은 단계를 생략하거나 새로운 경로를 개발해 추격에 성공할 수 있다.

한국의 몇몇 대기업이 일본의 선발자를 성공적으로 추격한 것은 이 같은 기술체제의 변화에 따른 기회의 창이 열렸기 때문이다. 그에 기민하게 대응해 일본의 선발자를 추월한 기업으로 삼성전자의 예가 널리 알려져 있다. 삼성전자의 생산성은 1990년대 후반 일본의 마쓰시타전기(현 파나소닉)와 같은 수준에 도달했으며 2000년 이후 마쓰시타를 추월했다. ‘추월’에 이를 정도로 성공한 사례는 그리 많지 않다. 현대자동차는 1990년대 후반 일본의 도요타자동차에 근접한 적이 있지만, 이후 차이를 좁히지 못했다.

양국의 상장 제조기업의 생산성을 비교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한국의 제조기업은 1995년까지 일본의 경쟁 상대를 추격해 생산성 격차 ‘10% 이내’에 접근했지만, 이후 추격은 중단됐다.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추격의 주력군을 이루는 제조 대기업의 쇠퇴가 가장 중요했다고 보인다. 예컨대 종업원 300명 이상 제조 대기업은 1993년 1223개에서 2012년 687개로 줄었다. 그 대신 경제민주화 덕분에 종업원 50명 미만의 영세제조업이 27만여 개에서 35만여 개로 증가했다. 감속성장의 한국 경제는 대규모 노동력을 고용해 제조업에 종사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위험하거나 경제적으로 타산을 맞추지 못하는 환경으로 변했다.

이영훈 < 前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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