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따라 공개 여부 제각각…선진국은 공개원칙 분명
[ 이주현 기자 ]
지난 5일 경찰은 ‘제주 전(前) 남편 살인사건’으로 구속된 피의자 고유정(36)의 신상을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고씨의 범죄 행각이 워낙 잔혹했기 때문이다. 고씨는 지난달 25일 제주의 한 펜션에서 전 남편 강모씨(36)를 살해한 뒤 시신을 토막 내 해상과 육지 등에 유기한 혐의를 받는다. 칼, 고무장갑 등 범행도구를 미리 구입하고 증거 인멸에 필요한 표백제를 사는 등 계획범죄 정황이 드러났다. 이혼 후 아이를 양육하지 않으면서도 전 남편인 피해자에게 양육비를 요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날 고씨는 얼굴 대신 정수리를 공개하는 데 그쳤다. 머리카락에 가려 얼굴이 드러나지 않았다. 진짜 얼굴이 공개된 건 이틀이 지난 7일에서다. 강력범죄자의 신상공개 기준을 놓고 논란이 가열되는 배경이다.
신상공개 10년째…공개 여부·시기 일관된 기준 없어
국내에서 흉악범의 얼굴 등 신상정보를 공개한 지는 올해로 10년째다. 2008년 조두순 사건을 계기로 2010년 특정강력범죄의 처벌에 관한 특례법이 개정돼 범죄자의 신상공개 기준이 정해졌다.
하지만 피의자 신상공개 기준이 일관되지 않다는 비판이 제기돼 왔다. 올 들어 신상이 공개된 강력범죄 피의자는 경남 진주아파트 방화사건의 안인득(42), 이희진 부모 살인사건의 김다운(34) 등에 이어 고씨가 세 번째다. 앞선 두 명은 이름·나이·얼굴 등이 함께 공개됐다. 고씨만 얼굴 공개가 늦어진 것을 두고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비판이 나온다. 경찰은 “고씨에 대한 조사가 충분히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얼굴을 공개하면 심경 변화 등으로 수사가 제대로 되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고 말했다.
신상공개 여부도 오락가락한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경찰은 지난해 10월 발생했던 ‘등촌동 전처 살인사건’과 ‘춘천 예비신부 살인사건’의 피의자 신상을 공개하지 않았다. 신상 공개 시기에도 일관성이 없다. 2017년 ‘창원 골프장 납치 살인사건’의 경우 구속영장이 발부되기 전에 피의자 신상이 공개됐다. 반면 2017년 ‘어금니아빠’ 살인사건의 피의자는 구속 후에 신상공개 결정이 났다. 고씨도 마찬가지였다.
위원회 있지만 외부 전문가에 따라 제각각
경찰은 신상공개심의위원회를 열어 흉악범의 신상공개 여부를 결정하고 있다. 이 위원회는 7명으로 구성된다. 네 자리는 시민단체 등 외부 전문가 몫이다. 외부 전문가의 구성은 사건에 따라 달라진다.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에선 정신과 의사가 참여했으나 ‘제주성당 묻지마 살인사건’에서는 목사가 참여해 신상공개 결정을 논의했다.
현행법상 신상공개 조건은 중대한 피해가 발생한 강력범죄, 충분한 범행 증거, 국민의 알권리 등 공공 이익, 범인이 미성년자가 아닌 경우로 두루뭉술하게 표현돼 있다. 뚜렷한 기준이 없다 보니 비슷한 사례를 놓고 신상공개 여부가 달라질 수 있다. 2016년 발생했던 강남역 살인사건과 수락산 살인사건의 피의자는 모두 정신질환이 있었지만 신상공개 여부는 엇갈렸다.
신상이 공개되더라도 피의자 얼굴이 모두 드러나는 건 아니다. 피의자가 옷이나 모자로 얼굴을 가리는 걸 경찰이 막을 수 있지만 머리카락이나 손을 이용하면 속수무책이다. 사진 촬영을 위해 피의자 자세를 고치도록 요구하면 인권침해로 보일 우려가 있어 경찰로서도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기가 쉽지 않다.
해외에선 “공익 우선” 분명…미국은 ‘머그샷’으로 얼굴 공개
미국 영국 일본 등 선진국에선 흉악범에 대해 철저하게 신상을 공개하는 게 원칙이다. 미국은 경찰이 범인을 촬영한 사진인 ‘머그샷’을 통해 피의자 얼굴을 공개한다. 미성년자라 하더라도 잔혹한 범죄를 저질렀다면 재범을 막기 위해 여지없이 얼굴을 드러낸다. 미 연방대법원은 강력범죄 피의자를 ‘공인’으로 간주하고 있다.
다른 나라도 사정이 비슷하다. 무죄 추정의 원칙을 인정하고 있는데도 국민의 알 권리 등 공익적 목적이 우선한다고 보는 것이다. 영국·일본은 주요 언론을 통해 강력범죄 피의자의 신상을 드러내고 있다. 프랑스에서도 흉악범에 대해선 가차 없다. 2006년 서울 반포동 서래마을에서 갓난아이를 냉장고에 유기했던 프랑스인 부부는 국내에선 얼굴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프랑스에서 모두 공개됐다. 반면 독일의 경우 증거가 명백하더라도 신상을 보호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NIE 포인트
강력범죄 피의자의 신상공개 기준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경찰이 흉악범 얼굴을 적극적으로 공개하는 게 바람직할지 토론해보자. 명확한 흉악범 신상공개 기준과 원칙이 어떠해야 할지 생각해보자. 외국의 사례도 알아보자.
이주현 한국경제신문 지식사회부 기자 dee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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