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 눈물…올들어 무 가격 '곤두박질'

입력 2019-06-18 17:42   수정 2019-06-19 11:06

2분기 도매가 작년 절반도 안돼

가격 회복될 시기에 '꽃대' 피해



[ 안효주 기자 ]
18일 새벽 전북 고창군 무장면으로 향했다. 무값이 폭락했다고 해서 찾은 곳. 무청으로 초록이 넘쳐야 할 밭은 온통 새하얀 색이었다. 무밭이 아니라 메밀밭 같았다. 절로 탄식이 나왔다. ‘추대(꽃대)’였다. 무가 꽃을 피우면서 꽃줄기가 솟아나는 현상. 꽃이 영양분을 빨아들여 알뿌리인 무 안에 질긴 심이 생긴다. 먹을 수 없거나 질이 떨어진다. 옆을 보니 갈아엎은 무밭이 펼쳐져 있었다.

무 농사를 짓는 서대식 씨(52)가 밭에 나왔다. 그는 “폭락한 무값이 회복되면 팔려고 했는데 이 꼴이 됐다”고 했다. 약 10만㎡(3만여 평) 무밭 가운데 70% 면적에 추대가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그는 20년 무 농사를 짓는 동안 이런 흉작은 처음 봤다고 말했다. 무장면뿐 아니라 대산면, 흥덕면도 비슷했다. 국내 최대 무 산지인 호남 일대가 가격 폭락에 이은 추대 사태로 쑥대밭이 돼가고 있다.

올 들어 무값 폭락 “농사도 망쳤는데…”

올 들어 무값은 곤두박질쳤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에 따르면 올해 2분기 무 한 상자(상품·20㎏)는 도매시장에서 8770원에 거래됐다. 지난해 같은 기간 평균 가격(1만8970원)의 절반도 안 된다. 개당 소매가격은 1510원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41%나 떨어졌다. 4년 만에 가장 낮다. 이달 들어 20㎏ 도매가가 평균 9224원으로 올라왔지만 평년 가격에 비하면 여전히 50% 수준이다.

이 지역 농가들과 계약을 맺고 무를 떼어다 파는 도매상 오모씨(69)가 때마침 나타났다. 상황을 둘러보러 왔다는 그에게 무 가격에 대해 물었다. 그는 “봄가을은 호남, 겨울은 제주에서 무가 많이 나는데 지난 겨울 날이 따뜻해 무 농사가 잘돼도 너무 잘됐다”고 말했다. 공급이 넘쳐 전국 곳곳의 농산물 창고에 무가 남아 있다는 얘기였다. 그의 말대로 겨울 무가 팔린 지난 1분기 내내 무 도매가격은 최근 7년 새 가장 낮았다.

오씨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고 했다. 그는 “가락시장 등 대형 농수산 도매시장에서 개인 소매상들이 식자재를 떼어 가 일반 식당에 대주는데, 올 들어 문 닫은 식당이 많다는 얘기들을 하더라”고 했다. 주 52시간 근로제 등으로 식당에 손님이 줄어 무 수요가 감소하고 이는 가격 폭락에 영향을 미쳤다는 설명이다. 오씨는 “장사가 안돼 식당주인이 야반도주해 무값을 못 받았다는 상인도 있다”고 전했다. 자영업자의 어려움이 농가로 번진 셈이다.

평생 농사를 지었다는 농민 주정관 씨(65)가 밭 근처 마을회관으로 걸어왔다. 그는 “그나마 이번 봄 무로 먹고살까 했는데 그마저도 어려워졌다”며 한숨을 쉬었다. 겨울 무 창고가 비어가자 무값이 조금씩 오르기 시작했지만 추대로 인해 팔 수 있는 무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주씨는 중간 상인들한테서 잔금도 못 받고 있다. 그는 “계약재배를 했는데 농사를 망쳐 물건을 못 대니 먼저 가져간 무값도 안 준다”며 “동네에는 빚을 못 갚아 농협에서 압류가 들어온다는 농가도 생겼다”고 말했다.

농가 “이런 흉작 처음…팔 무가 없다”

추대는 지난달 중순부터 고창군 무밭을 꽃밭처럼 만들어버리기 시작했다. 대산면 일부 지역에서 시작돼 군 전역으로 퍼졌다. 인근 부안군, 전남 영암군 등에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농민들은 국내 최대 종자업체인 팜한농으로부터 사서 뿌린 종자에 문제가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팜한농의 한 종자를 수년째 재배하고 있는데 올해 종자에서만 추대가 나타났다”고 말했다. 이어 “다른 종자를 뿌린 농가와 비교해 올해부터 뉴질랜드에서 생산된 팜한농 종자를 쓴 곳만 유독 심하다”고 덧붙였다. 고창군과 부안군 등 8개 지역에서 피해를 본 농민들은 팜한농에 피해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 이들이 밝힌 피해 농지는 약 100만㎡(30만 평). 3.3㎡(1평)당 7000원씩 총 21억원을 보상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팜한농은 농민들과 대화하면서도 종자 탓이 아니라 이상 기온 때문에 추대가 나타났다고 주장하고 있다. 팜한농 관계자는 “작년 3월엔 고창지역 최저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 날이 9일이었지만 올해는 15일이나 됐다”고 말했다. 또 피해를 입은 농가 세 곳에서 9개 종자의 무를 채취해 분석했더니 이 중 5개는 팜한농이 아니라 다른 회사 제품이었다고 설명했다. 아직 풀리지 않은 책임 소재를 밝히기 위해 종자의 이상 유무 분석을 국립종자원에 맡길 예정이다.

무 가격 폭락에 이어 추대 현상으로 농사를 망친 고창군 농민들을 허탈하게 한 일은 또 있었다. 주씨는 “관광객들이 꽃축제를 하는 줄 알고 사진 찍는 것을 봤을 때 마음이 문드러지는 것 같았다”고 했다.

무 가격도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농촌경제연구원에 따르면 무 도매가는 월동 무가 시장에 모두 풀리는 이달 중순 이후 잠깐 올랐다가, 다음달 전국 봄 무 출하량이 늘어나면 회복세에 제동이 걸릴 전망이다. 무값은 돌아오지 않고, 내다 팔 농작물도 없는 무 농가의 시름은 깊어지고 있다.

고창=안효주 기자 jo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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