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평생 잊지 못할 아픈 상처를 안고 세상을 살아간다. 법무관 말년차 시절, 신입으로 후배 한 명이 들어왔다. 인품이나 성실함에서 더할 나위 없는 후배였다.
몇 년 뒤 후배가 법무관을 마칠 때 향후 진로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후배의 심성과 실력을 잘 알고 있었던 나는 우리 회사에서 같이 일하자고 설득했다. 이미 다른 회사에서도 입사 제안을 받고 있던 후배는 고민 끝에 필자와 같은 회사에서, 그것도 같은 팀에서 일하게 됐다. 같이 일하게 된 지 약 1년쯤 지났을 무렵, 필자는 개업하기 위해 회사에서 퇴사했다.
퇴사 후 1년쯤 지났을까, 유난히도 추웠던 겨울날 밤이었다. 후배와 같은 회사에서 일하고 있던 친구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그날 저녁 의뢰인과 술자리를 마치고 귀가한 후배가 집에서 쓰러져 병원으로 옮겼으나, 응급실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이다.
사흘 내내 빈소를 지키면서 내 자신을 질책했다. 후배가 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내가 후배와 같이 일하자고 제안하지 않았더라면, 후배와 같이 회사를 그만뒀더라면, 그만둔 이후에도 후배에게 가끔이라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줬다면 어땠을까. 후배와 그렇게 작별인사를 나눴다.
그로부터 2년 후 필자가 부친상을 당했는데 장지가 그 후배가 잠들어 있던 곳과 같은 곳이었다. 부친을 모시고 나서 후배를 만나러 갔다. 가끔 후배를 만나러 갈 때는 인지하지 못했지만 그때 다시 보니 후배 이름만 새겨져 있어야 할 가족묘 비석에 이름이 하나 더 새겨져 있었다. 후배의 아버지였다. 돌아가신 날짜를 보니 후배가 세상을 떠난 지 정확하게 1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후배의 아버지께서 발인을 마치고 “내가 죽어서 묻히려고 했던 가족묘에 하나뿐인 내 아들을 먼저 묻게 될 줄은 몰랐다”고 대성통곡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회자정리(會者定離),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다고 한다. 인생무상(人生無常)이라는 말로 애써 태연한 척하거나 괴로움을 지우려고 해보지만 여전히 태연하기 힘들고 괴로움은 지우기 어렵다. 우리의 인생은 죽음이라는 이별을 향해 가는 느린 여정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몽테뉴가 《수상록》에서 얘기한 것처럼 죽음을 자주 떠올리고 죽음에 익숙해져야 할지도 모른다.
만날 때에 헤어질 것을 염려하지만 막상 예상치 못한 이별을 대하게 되면 예상치 못한 새로운 슬픔에 빠진다. 하지만 이별은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려주는 고마운 단어이기도 하다. 만남 뒤엔 이별이 있는 것처럼 이별 뒤엔 만남이 있을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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