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렌 러펠 셸 지음 / 김후 옮김
예문아카이브 / 488쪽 / 1만8000원
[ 윤정현 기자 ]
핀란드 북부에 자리잡은 정육가공 회사 스넬만은 돼지고기, 소고기, 닭고기 등으로 다양한 가공품을 생산한다. 이곳에선 소시지를 만드는 생산직 직원들도 즐기면서 일한다. 한 직원에게 “일의 어떤 점이 좋으냐”고 묻자 그는 답했다. “우리가 이 나라 소시지의 품질을 바꿔놨고 이렇게 생산한 소시지엔 깊은 철학이 담겨 있다. 나는 매일같이 조금씩 이곳에서 좋아지고 있다.” 회사는 직원들이 체력을 관리할 수 있는 운동시설을 갖춰 놓았고, 사내 교육 과정으로 교수를 초빙해 철학과 언어학 강의도 지원했다.
스넬만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복지를 제공하는 실리콘밸리 기업도 많다. 그럼에도 이들 기업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시간에 쫓기고 경쟁에 시달리며 이직이 잦다. 《일자리의 미래》를 쓴 엘렌 러펠 셸 보스턴대 저널리즘학 교수는 복지의 ‘질’이 아니라 ‘목적’에서 그 차이를 찾는다. 그는 스넬만이 “당신의 모든 역량을 회사에 바칠 수 있도록 뒷받침하겠다”가 아니라 “당신이 일의 의미를 찾고 자기계발을 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스넬만 직원은 2000명이 넘고, 협업 중인 핀란드 농부는 2100명에 이른다. 매일 배우는 직원들과 함께 60년 역사를 지닌 이 회사도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일자리의 미래》는 디지털 시대의 일자리 대란과 그 여파를 살펴본다. 하지만 기술이 주도하는 일자리의 파괴와 로봇, 인공지능이 사람을 대체하는 현상을 좇는 데 주력하는 책은 아니다. 그간 일자리에 얽매었던 우리 삶의 통제권을 어떻게 되찾을 수 있는지를 파고든다.
오늘날 일자리 문제는 정치적인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 올 4월 미국의 실업률은 3.6%로 떨어졌다. 1969년 12월 3.5%를 기록한 이후 50년 만에 최저 수준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와 관련된 트윗을 연이어 띄우며 자화자찬했다. 하지만 저자는 “핵심은 일자리의 질이지 양이 아니다”고 꼬집는다. 늘어난 일자리 대부분은 근무환경이 열악하고 임금을 적게 주는 형태라는 것이다.
책에 따르면 미국 노동자 중 절반가량이 연간 3만달러도 안 되는 소득을 올린다. 노동자 중 겨우 25%만 연 5만달러 이상의 소득을 얻고 있다. 가계의 모든 비용은 계속 상승해 일자리가 늘었음에도 보통 사람들의 생활은 어려워지고 있다. 고용률이 꾸준히 개선되고 있다는 정부 발표가 공공 일자리, 알바 쪼개기 등 단기 일자리 증가로 나타나는 한국의 현실을 보는 듯하다.
‘노동을 위한 교육’을 다룬 3부에서는 한국이 사례로 등장한다. 저자는 “대학 진학률이 세계 1위인 한국은 세계에서 대학 졸업자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라며 “최근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전체 실업인구 가운데 50% 이상이 대학 학위를 소지하고 있다”고 전한다. ‘교육 프리미엄’이란 것이 사라진 한국 상황을 통해 교육의 의미를 묻고 있다. 책 후반부에 등장하는 핀란드의 교육 환경과도 비교된다. “핀란드의 학교에서는 어렸을 때부터 학생들이 ‘무엇을 알고 있는가’를 측정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알고 있는 것으로부터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평가한다”는 대목이 와닿는다.
책은 대학과 교육의 역할뿐 아니라 전통적인 제조업의 미래와 더불어 자유시장에서 노동조합의 의미도 조명한다. 많은 주제를 다양한 관점에서 다뤄 다소 산만한 느낌은 들지만 세계화와 자동화라는 파고에도 좋은 일자리는 존재하고, 그 분야 역시 넓다는 저자의 주장은 명확하게 드러난다. 일자리 숫자를 늘리기에 몰두하기보다 지속가능한 ‘좋은 일’을 창출해가려는 노력은 기업과 정부, 개인과 사회가 함께 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책은 ‘생계를 위한 돈벌이’를 넘어선 일의 의미와 본질에 대해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한다. ‘당신은 왜 일하는가’란 질문에 저자가 인용한 영국의 비평가 존 러스킨은 답한다. “사람이 하는 일로부터 받는 최고의 보상은 그 일을 통해 무엇을 얻느냐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 무엇이 되는가다.”
윤정현 기자 hi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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