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세계는 냉전 종식 이후 경험하지 못한 전환기 진통을 겪고 있다.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질서, 그 안에서 세계화, 정보기술(IT) 등 과학기술 발전을 기반으로 한 안정과 번영의 시대가 완전히 다른 국면을 맞고 있다. 러시아의 크림반도 침공과 병합,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등장,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미·중 무역분쟁 등이 새로운 국제질서의 주요 요소가 됐다.
협력과 통합(convergence)이 ‘경쟁’과 ‘충돌’로 변해가고 있다. 국제질서 변화를 어떻게 해석하고 전략적으로 대응해 나갈지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대전환기의 새로운 단계가 시작된 것인가? 이런 문제의식을 선구적으로 던진 석학이 새뮤얼 헌팅턴이다. 그는 인류문명은 민족들의 문화적, 지역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충돌하면서 발전한다는 이론을 주창했다. 과거에는 왕조, 민족, 이념을 둘러싼 투쟁이 문명발전의 동력이었으며, 미래에는 문화, 그중에서도 종교를 둘러싼 충돌이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했다. 헌팅턴 주장대로라면 문명 간 대립·충돌은 인류문명이 발전하기 위해 필연적인 과정이며 전쟁 또한 가정하지 않을 수 없다.
반면 문명교류학자 정수일 교수는 인류문명이 ‘협력’과 ‘교류’를 통해 발전한다고 주창한다. 정 교수는 그 상징으로 실크로드를 지목한다. 실크로드는 비단뿐 아니라 사람과 그 사람들이 만들어낸 정치, 경제, 문화, 사상 등이 끊임없이 모이고, 새로워지며, 더 멀리 퍼져나가는 길이다. 그 과정이 인류문명의 발전 경로였다.
서기 1000~1500년 사이 활발했던 지중해 바닷길 또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세 지중해는 풍부한 물자와 교류의 바다였고, 무엇보다 유럽 역사 발전을 이끈 원동력이었다. 서유럽 세력이 지중해 진출을 모색하던 당시, 비잔틴 제국과 이슬람 세계의 발전상은 이미 서유럽을 압도했다. 상대적 후발주자인 서방 기독교 세력은 비잔틴 제국 등 동방의 선진문화를 스스럼없이 수용하고 취득했다. 이탈리아 주요 상업도시였던 베네치아와 피렌체는 지중해 교역을 통해 경제적 부를 쌓았다. 이런 토대 위에서 르네상스 시대가 시작될 수 있었다. 활발한 지중해 교역은 항해술과 조선기술의 비약적 발전을 촉진했고 대항해시대와 아메리카 대륙 발견으로 이어졌다.
역사에 ‘만약’이란 가정은 부질없지만 서유럽 세력과 동방세력, 양자가 ‘교류’ 대신 ‘충돌’을 택했다면 인류사의 물줄기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문명충돌인가, 문명교류인가. 세계사 전환기에 인류가 깊게 천착해야 할 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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