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종 소송법 등 법률안 제출권을 주며
대법관 등의 당파적 임명을 제한해야
윤성근 <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
재판 도중 갑자기 법정 옆문이 열리고 포승에 묶인 사람과 교도관들이 들어오더니 법정을 가로질러 반대편 문으로 사라진다. 이게 무슨 일일까.
구속된 피고인의 동선이 일반인과 섞이면 곤란하다. 구속된 모습이 공개되는 것은 인권침해이며 무죄 추정의 원칙을 잠식한다. 피해자나 정의감 넘치는 대중이 피고인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고, 공범과 연락하거나 금지품이 전달될 위험도 있다. 형사법정을 설계할 때 이 문제는 중요한 고려 사항이다. 그런데 일부 법원에서는 형사법정이 부족해 당초 민사법정으로 설계된 곳을 전환해 사용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피고인의 동선이 제대로 확보되지 않는 것이다.
민사법정도 부족하긴 마찬가지다. 법정 하나를 여러 재판부가 함께 사용하고 있다. 당사자와 재판부가 원해도 기일을 마음대로 넣을 수 없다. 대한민국 정도의 국격을 갖춘 나라에서 법정이 부족하다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사람이 만든 제도는 예산이 있어야 작동한다. 어떤 고매한 이상과 훌륭한 경륜도 예산 없이 실현되기는 어렵다. 그런데 우리나라 법원은 예산안을 스스로 편성할 권한이 없다. 법원 예산은 기획재정부가 대신 편성해서 국회의 심의를 받는다. 법원은 그 특성상 기재부를 접촉해 예산안을 설명하거나 설득하기도 어렵다.
법원 예산은 입법부 심의 전에 행정부의 강력한 사전 통제를 받는다. 그 결과 2019년 예산안의 경우 법무부는 약 4조원, 법원은 약 2조원으로 두 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 차이는 그동안 계속 확대돼왔다. 이렇게 취약한 재정을 놓고 삼권분립을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예산 독립은 사법부 독립의 첫 단추다.
모든 국가 기관은 법적 근거를 갖고 움직인다. 그런데 법률안 제출권은 국회의원과 행정부에만 있으며 법원은 권한이 없다. 법원은 자기 조직이나 재판 절차에 대해서도 스스로 제안할 권한이 없다. 법무부나 국회의원에 의존해야 한다. 국제적인 재판기구도 당초 그 설치에 관한 유엔 결의 등 근거가 있으면 내부 조직이나 재판 절차 등은 스스로 정한다.
구(舊)형사소송법 하에서 검사가 제출한 서류만 보고 구속 여부를 결정하던 시절이 있었다. 검사가 결심만 하면 구속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이것은 일제의 잔재로서 마그나카르타 이후 세계인권선언을 거쳐 발전해온 헌법정신과 인권보장정신에 정면으로 반한다. 사람을 구속할 때는 당연히 법관이 그 사람을 대면해서 증거인멸이나 도주의 우려가 있는지 살펴봐야 하고 변명할 기회도 줘야 한다. 너무나 당연한 이 제도가 도입되기까지 말로 다 하지 못할 노력과 갈등이 있었고 그 여파는 아직도 남아 있다. 법원에 법률안 제출권이 있었다면 그런 불필요한 갈등과 시간 낭비는 없었을 것이다. 적어도 법원 조직법이나 각종 소송법, 증거법에 관해서라도 법원에 법률안 제출권이 있어야 한다. 검찰은 형사소송의 한쪽 당사자인데 법무부가 소송법 개정에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것은 이상하다. 게임의 규칙을 정할 때 한쪽 당사자가 주도하는 모양이다.
마지막으로 법관의 임명 문제가 있다. 과거 대통령이 법관 전체의 임명권을 행사하던 시절 사법 독립은 심각하게 위협받았다. 대법원으로 임명권이 옮겨온 후 적어도 개별 법원이나 개별 재판에 대해 정치권이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오해는 불식됐다. 대법관이나 헌법재판관은 대통령이 임명할 수밖에 없겠지만 당파적으로 임명된다는 오해는 불식시켜야 한다. 또 현재의 관행에서는 대통령 임기 후반부로 가면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의 구성 법관 과반수가 현직 대통령이 임명한 사람으로 채워진다. 이것은 사법부 독립에 대한 위협이다.
해결책 중 하나는 대법관과 헌법재판관을 종신제로 하거나 임기를 늘려 어느 대통령의 임기 중에도 그 대통령이 임명한 사람이 과반이 될 수 없게 하는 것이다. 종신제가 어렵다면 한 번 중임 또는 연임하는 관행을 마련하는 것도 방법이다.
인권 옹호를 비롯해 법의 실질적 내용은 사법부의 독립을 통해 보장된다. 현재 사법부는 예산편성, 법률안 제출, 최고법관 임명 등 핵심적 문제에 관해 대통령과 행정부의 과도한 영향력 아래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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