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태철 기자 ] 교육계에서 미국 철학자인 존 듀이(1859~1952)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다. ‘근대 교육의 아버지’로 불리는 것이 말해주듯 그의 위상은 독보적이다. 교사와 교과 중심이던 교육이론을 학습자 중심으로 바꿔 ‘교육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정치·경제사상 분야에선 ‘실용주의 철학의 계승자’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게 열렬한 지지자가 많지 않다. 상당수 자유주의 경제학자는 그를 ‘수정자본주의자’라고 비판한다. 1935년 펴낸 《자유주의와 사회적 실천(Liberalism and Social Action)》에서 정부의 적극적인 시장 개입을 지지했다는 이유에서다. 일부 학자는 ‘좌파 경제학자’로 몰아세우기도 한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지도력을 발휘해야 하지만, 그 역할은 빈곤 등 치명적인 문제 해결에 국한돼야 한다”고 주장했던 그로선 억울한 측면이 있다.
복지국가는 보수가 만든 '예방국가'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와 사회적 실천》은 진영을 떠나 경제학도들에겐 스테디셀러로 꼽힌다. 실사구시의 실용주의적 철학을 고스란히 담아 사회·경제문제 해결에 유용한 정책적 대안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를 살리기 위해 출간했다”는 듀이의 말처럼 당시 위기에 처했던 미국 자유주의와 시장경제를 구원하는 데 작지 않은 역할을 했다. “자유주의가 기득권화돼 선제적 사회문제 해결 능력을 잃어버리면 사회주의자와 선동가들에게 영원히 끌려갈 수밖에 없다”는 교훈도 제시했다.
당시 미국은 1929년 시작된 대공황이 장기화되면서 총체적 난국에 빠져 있었다. 지식인들조차 대공황이 야기한 극심한 충격 탓에 자유방임적 자유주의와 작은 정부가 더 이상 시대적 가치와 변화를 담아내지 못한다는 절망을 쏟아냈다. “그해(1934년) 겨울, 미국인 1300만 명이 실업자였다. 길거리엔 누더기를 걸친 굶주린 사람이 득실댔다. 사회주의 정부가 아니면 구제 방법이 없을 것 같은 그 사회에서, 기독교 모태신앙자인 나는 사회주의자가 돼야 한다는 도덕적 강박에 끊임없이 시달리곤 했다.”(미국 작가 알프레드 케이진)
이런 상황에서 듀이가 내놓은 처방이 실용주의를 바탕으로 한 ‘개혁적 자유주의’다. 듀이는 이를 ‘끊임없이 사회적 모순 해결에 주도적으로 나서는 자유주의’로 정의했다. 그는 자유주의의 태생과 역사, 본질이 진보라고 강조했다. ‘자유주의=기득권=보수’라는 당시 미국 사회의 도식적인 인식을 반박했다. “자유란 어떤 때는 노예제도 폐지를 의미했다. 17~18세기에는 전제주의 왕정으로부터의 해방을 일컬었다. 19세기에는 새로운 생산력과 기술, 산업 발전을 가로막는 관습법 체계를 타파하는 것이었다. 자유주의자는 100여 년 전만 해도 체제 전복적인 급진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듀이는 자유주의 위기가 사회문제 해결 능력을 상실한, 기득권화된 자유주의 내부에서 기인했다고 설파했다. 빈곤 심화와 극심한 빈부 차 확대 등 파괴적인 모순들을 그저 ‘개인의 능력 탓’으로만 돌리고 구제를 소홀히 하자 사회주의 선동가들이 국민을 동요시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는 사회 상황에 맞춰 공공복리를 위해 사유재산권도 일부 제한할 수 있다는 견해를 내놨다. “이제 자유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의 고통을 인정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선 늘 자본주의 지배자의 편에 서는 자들이란 비판을 받고 있다. 사회는 ‘사적 자치의 원리’를 강조하면서 이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있다.”
듀이가 주창한 ‘제한된 범위 내 적극적인 정부 역할’은 이런 시대적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영국 사상가 토니 주트가 주장한 ‘복지국가=예방적 국가’의 이론적 근거가 됐다. 복지국가는 보수진영이 공산주의로부터 자유주의를 지키기 위해 만든 ‘예방적 국가’란 의미다. 실제로 세계 최초로 사회보험을 도입한 사람은 보수주의자였던 독일 재상 비스마르크였고, 영국 공공복지 법규의 원칙을 확립한 ‘베버리지 보고서’를 승인한 사람도 영국 보수당 정권의 처칠 총리였다.
"선제적 문제 해결 능력 발휘해야"
“기본적인 교육과 의료가 충족되지 않는 곳에서는 국가 개입이 불가피하다. 그렇지만 국가 개입은 사회적 폐해와 모순 해결에 국한돼야 한다. 자립을 해치는 과잉 복지는 개인에게 오히려 독(毒)이다. 민생을 모두 책임진다는 ‘아버지’ 같은 통치자 치하에서는 개인의 자율성과 시장경제의 효율성이 발휘될 수 없다. 사회개혁도 개인의 자유와 사회의 도덕적 품성의 틀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
듀이는 교육이야말로 자유주의를 지키는 수호신이라고 강조했다. 시민적 자질과 대의민주주의 교육을 통해서만 진정한 자유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봤다. “교육은 자유와 평화 등 자유주의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시민적 자질 향상에 주력해야 한다. 진정한 자유주의자의 임무는 전통적 자유주의가 강조하는 인간의 개성과 자유로운 지력(知力)을 옹호하고, 그 가치들이 변화하는 사회 상황에서 새롭게 발현되도록 돕는 것이다. 기존의 관습 제도 신념을 현실적 조건에 맞게 보완하는 일이다. 사회 모순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선제적으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게 자유주의를 지키는 지름길이다.”
김태철 논설위원 synerg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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