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도 또는 180도 뒤집거나 압축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만든다.
멍멍이를 '댕댕이', 귀엽다를 '커엽다' 식으로 바꾼 게 대표적 사례다.
[ 홍성호 기자 ]
‘야민정음’ 논란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지난 2월 식품기업 팔도에서 한정판으로 선보인 ‘괄도네넴띤’이 논란을 증폭시켰다. ‘팔도비빔면’을 비슷한 형태의 다른 글자로 바꿔 내놨다. 이 작명이 마케팅에 성공하면서 화제가 되자 한글 파괴 비판으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사물 모양 통해 한글 익혀…야민정음의 원조 격
야민정음은 기존의 말을 비슷한 형태의 다른 표기로 바꾸는 것에서부터 90도 또는 180도 뒤집거나 압축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만든다. 멍멍이를 ‘댕댕이’, 귀엽다를 ‘커엽다’ 식으로 바꾼 게 대표적 사례다. 그런데 우리 글자를 이런 식으로 푼 게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100여 년 전 한글을 대중적으로 보급할 때도 야민정음의 아주 먼 원조격 학습법이 있었다.
‘세 발 가진 소시랑은 ㅌ자라면, 자루 빠진 연감개는 ㅍ 되리라//지겟다리 ㅏ자를 뒤집음 ㅓ자, 고무래 쥐고 보니 ㅜ자가 되고….’(소시랑은 쇠스랑의 방언으로 갈퀴 모양의 농기구. 연감개는 ‘연(鳶)+감개’로 연줄을 감는 도구인 얼레를 말한다. 가운데 자루를 박아 만든다. 고무래는 밭일 할 때 쓰는 ‘丁(정)’자 모양의 농기구. 당시 일상어가 지금과 많이 달랐다는 것도 참고로 알아 둘 만하다.)
1933년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한글공부>(이윤재 저)에 실린 ‘문맹타파가’다. 당시 우리 민족 2000만 명 중에 80%가 문맹이었다. 한글을 보급하던 초기에 한글을 형상(생김새)으로 배웠음을 알 수 있다. 사물의 모양에 한글을 대입시켰다. 여기서 한 번 더 응용하면 모양을 본떠 만드는 야민정음 방식과 크게 다를 게 없다.
한글의 다양한 변신…우리말 토대 강화해
2015년 전후로 널리 퍼진 야민정음은 ‘진화’란 관점에서 보면 비판만 할 일은 아니다. 예전부터 말을 비틀어 쓰는 것은 흔했다. 1997년 말 외환위기 직후엔 ‘연봉錢爭’(전쟁(戰爭)의 한자를 바꿔 ‘돈싸움’을 상징), ‘錢錢긍긍’(외화 부족으로 어려워진 나라경제를 전전긍긍(戰戰兢兢)에 빗댄 말) 같은 표현이 유행했다. 이후 생겨난 ‘사오정’(45세 정년), ‘이태백’(20대 태반이 백수) 등의 신조어도 같은 유형의 말들이다. 축약을 통한 칼랑부르(동음이의어) 수법이다.
1990년대 후반 쓰이기 시작한 ‘386’(30대+80년대 학번+60년대 출생)도 일종의 두문자어(頭文字語)다. 본래 컴퓨터 성능을 나타내는 용어였으나 당시 사회 상황을 반영해 특정 세대를 지칭하는 말로 쓰였다. 야민정음의 한 방식인 초성체와 비슷하다. 현대H몰이 2018년 10월 선보인 PB 브랜드 ‘ㄱㅊㄴ’ 같은 게 그런 것이다. ‘괜찮네’의 초성을 브랜드화했다. 2000년대 들어 18대 국회의 폭력 행태를 비꼰 ‘국케이원(또는 국K-1)’도 의미심장하다. 당시 인기를 끌던 이종격투기 K-1에 빗대 국회의원을 대신한 말로 사용됐다.
이들은 모두 표기나 발음의 유사함을 활용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기존의 단어에 새로운 형태나 의미를 덧칠해 본래 쓰임새와의 사이에 ‘틈’을 만들었다. 이 틈이 언어적으로 ‘긴장’을 유발한다. 이로 인해 새 말은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면서 짧은 시간에 급속도로 퍼졌다. 수사학적 효과다.
야민정음은 기표(시니피앙)를 바꿈으로써 그 효과를 극대화했다. 국어의 일탈이지만 진화 과정의 다양한 ‘변신’이기도 하다. ㅇㅋ, ㅋㅋㅋ 같은 표기는 한글의 재발견이자 또 다른 생산성을 보여준다. 혁신은 ‘고정관념에 대한 파괴’에서 시작된다는 이치를 다시 한번 새겨볼 기회다. 다만 공공언어의 영역으로 들어오는 데는 한계가 있다. 언어의 자정기능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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