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포럼] 선풍기의 변신, 사양기업은 없다

입력 2019-07-17 17:52  

사은품 처지였다가 부활한 선풍기처럼
고객가치 관점서 재해석하고 혁신하면
한물간 제품서도 새 기회 찾을 수 있어

김경준 < 딜로이트컨설팅 부회장 >



어린 시절 집에 선풍기가 한 대 있었다. 여름이 다가오면 부친은 창고에서 선풍기를 꺼내 정성 들여 닦고 조이고 기름을 쳤다. 가전제품이 귀하던 시절, 선풍기는 일반 가정의 중요한 재산목록이었다. 당시는 선풍기에 TV, 라디오, 전화만 있으면 부잣집이었다. 선풍기는 1970년대까지도 초등학교 가정환경 조사에서 보유 유무를 확인한 주요 품목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선풍기는 LG전자의 전신인 금성사에서 1960년 생산을 시작했다. 주요 부품을 수입한 조립품으로, 수입품 일색이던 시장에 도전장을 던졌다. 당시 가격은 제조업 생산직원 월급의 2배에 가까웠지만 수입품보다 저렴한 가격을 내세워 광고를 했다. 금성사 선풍기는 현재 기준으로 환산하면 대략 600만원, 수입품은 1000만원 내외의 고가 제품이었다. 그러나 이후 생산성 향상으로 선풍기 가격은 하락했고, 1990년대부터 중국산 저가 제품이 들어오면서 싸구려 가전의 대명사로 전락했다. TV나 에어컨을 사면 끼워주고, 휴대폰 서비스나 신용카드에 가입하면 증정하는 사은품 신세가 됐다. 국내 제조업체 입장에서는 이익이 나지 않으니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으로 물량을 조달하면서 사업의 관심권에서도 사라졌다.

천덕꾸러기 선풍기의 부활은 다이슨과 발뮤다가 주역이다. 영국 가전기업 다이슨이 내놓은 날개 없는 선풍기는 고가임에도 구매자가 줄을 이었다. ‘날개를 돌려 바람을 일으키는 기기’라는 기존 선풍기 개념에 회오리바람을 이용한 신기술 혁신으로 일대 전환을 몰고왔다. 기존 선풍기의 연장선상에서 디자인, 기능 개선만으로는 소비자에게 다가가기 어려워 아예 프리미엄 가전으로 포지셔닝하면서 선풍기에 대한 소비자의 개념을 바꿔놨다. 일본의 발뮤다는 날개 달린 선풍기의 연장선상에서 소비자 가치와 제품 개념을 재규정해 혁신적 제품을 출시했다. 기본으로 돌아가 날개의 개수와 모양을 재설계하고 소재와 디자인을 혁신해 기존 범용품과 완전히 구별되는 가격대로 출시했다.

우리나라 기업들은 서큘레이터라는 선풍기 인접시장에 주력했다. 에어컨의 냉방효율을 높이고 실내공기를 순환시키는 기능으로 재규정했다. 과거 독립가전이었던 선풍기는 에어컨이 보급되면서 구석으로 밀려났지만, 에어컨의 경쟁 제품이 아닌 보완 제품으로 재탄생했다.

선풍기의 변천사는 ‘사양산업은 있어도 사양기업은 없다’는 기업경영의 기본을 다시금 일깨우는 사례다. 1960년대 가정의 주요 재산이었던 선풍기는 시간이 흐르면서 싸구려 범용품으로 전락했고, 10여 년 전에는 소위 사양기업이 생산하는 사양제품의 전형이었다. 하지만 기술 혁신, 고객가치 변화, 제품 재규정으로 시장 지위와 제품 용도 등이 달라졌다. 무엇보다 시장 자체가 커지고 있다. 과거 저가 제품 수십 대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한두 대를 구입하는 높은 가격대로 주력 제품군이 이동하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선풍기만이 아니라 진공청소기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가정용 진공청소기 역시 시간이 흐르면서 싸구려 범용품으로 추락했다. 하지만 신기술을 적용하고 다양한 기능과 결합되면서 가격대가 올라가고 프리미엄 제품군으로 다시 포지셔닝되고 있다.

고객과 시장은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기업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다. 소위 한물간 제품이라도 고객 가치의 관점에서 재해석하면 새로운 기회를 찾아낼 수 있다. 반대로 현재 각광받는 제품이라도 미세하게 변화하는 고객 가치를 놓치면 순식간에 시장 지위가 추락한다. 시장경제에는 고객 가치의 변화를 감지하고 혁신적 방법을 통해 새로운 사업으로 연결하는 경쟁자가 언제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양산업, 사양제품이라는 단어 자체가 기존 시장과 제품의 개념에 매몰된 탁상공론이다. 산업은 부침을 겪고 제품도 라이프 사이클에 따라 변천하지만, 기업은 언제나 시장과 고객을 재해석해 새로운 기회를 감지하고 기술 혁신을 통해 미래의 사업으로 연결하기 때문이다. 아날로그 구(舊)질서가 막을 내리고 디지털 신(新)세계가 열리는 변곡점에서 더욱 필요한 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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