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최초의 문자는 대출을 기록하기 위해 발명됐다

입력 2019-07-25 17:23   수정 2019-07-26 01:27

금융의 역사

윌리엄 N. 괴츠만 지음 / 위대선 옮김
지식의날개 / 720쪽 / 3만9000원



[ 송태형 기자 ]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문학작품은 ‘길가메시 서사시’다. 고대 서남아시아 도시국가 우루크를 다스리는 길가메시가 자신의 신전을 지을 목재를 구하러 모험을 떠나는 이야기다. 이 서사시는 기원전 3000년께 쐐기문자로 처음 기록됐다. 그런데 이 문자가 출현하는 데 기여한 사람은 시인이 아니라 상인과 회계사였다. 잘 알려진 대로 쐐기문자는 시를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거래와 장부 기록을 위해 발명됐다.

금융학자이자 고고학자인 윌리엄 N 괴츠만은 “금융도구는 고대 서남아시아 초기 도시농경사회에서 최초로 모습을 드러냈다”며 “금융은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놀라운 발명인 문자와 함께 등장했다”고 주장한다. 그의 논리는 명쾌하다. 금융의 기본 단위는 시간을 넘나드는 계약이다. 문자는 미래에 확실하게 해석할 수 있는 지금 무언가를 기억하는 수단이다. 문자의 조상이 출현한 것은 금융에 필요했기 때문이다.

괴츠만은 저서 《금융의 역사》에서 5000여 년의 인류사를 문명과 금융이란 거대한 주제를 프리즘으로 조망한다. 문명의 ‘기술’인 금융이 발달하며 밟아온 주요 단계를 서양사와 중국사를 중심으로 살핀다.

저자는 문명이 발달하려면 시간과 위험이란 조건을 관리할 정교한 도구가 필요하다고 전제한다. 그 도구는 물론 금융이다. 저자는 금융이 단지 문명의 조력자일 뿐만 아니라 문명을 낳은 원천이었음을 설득력있게 제시한다. 최초의 문자는 대출을 기록하기 위해 발명됐다. 최초의 수학은 경제적 가치를 계량하고 평가하기 위해 출현했다. 최초의 법률도 재산권을 보호하기 위해 시행됐다. 문명의 가장 중요한 도구인 문자, 수학, 법률은 도시국가를 이룩했고, 정치와 함께 고도화한 금융제도는 아테네의 민주주의, 로마제국의 번영, 중국의 통일과 관료제, 유럽의 산업혁명을 이끌었다. 금융기술은 인류사회를 물질적, 사회적, 지적으로 발전시킨 필수불가결한 요소였다.

저자에 따르면 이런 위대한 업적을 이룬 힘은 바로 시간을 넘나들며 경제적 가치를 재할당하는 금융의 본질에서 비롯된다. ‘돈의 시간여행을 가능하게 하는 타임머신’인 금융은 자본을 재할당해 성장을 촉진할 뿐 아니라 미래를 상상하고 계량하는 능력, 경제적 상호작용의 개념을 익히게 해 인간의 지적 능력과 사고 수준을 발전시켰다.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금융도 다양해지고 정교해졌고, 불가능해 보이는 합의도 이끌어낼 수 있게 했다.

반면 문명의 성장은 그 자체로 많은 문제를 낳았고, 지금도 그렇다. 혁신을 통해 효율을 높이며 발전해온 금융기술도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다. 채무의 발명은 노예제, 전쟁배상금, 제국주의, 금융위기로 이어졌다. 카를 마르크스는 돈이나 주식회사 같은 금융제도를 뿌리 뽑을 꿈을 꾸기도 했다.

하지만 저자는 “금융 없는 세상은 생각할 수조차 없다”고 강조한다. 금융도구 없는 세상으로 시계를 되돌리자는 주장은 문명 이전의 생활방식으로 회귀하자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저자가 보기에 20세기 이후 금융기술은 끊임없이 혁신하며 주요 사회문제에 새로운 해결책이 등장하도록 이끌었다. 주택가격 하락이나 실업에 대비한 금융상품이 연구되고 저출산·고령사회를 대비하는 연금제도 역시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현대 금융은 여러 경제를 단단히 묶어 복잡한 국제문명을 만드는 중요한 수단이 됐다. 국제문명의 구성원으로서 우리는 현재의 수요와 미래의 수요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을 것인가, 사회 구성원이 부유하든 가난하든 모두 금융의 혜택을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저자는 “우리는 금융이 제기하는 기본 문제와 계속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며 “5000년에 이르는 금융의 역사가 혁신의 방향을 제시할 것”이라고 말한다.

송태형 기자 toughlb@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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