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대해도 되는 나라" 정부가 자초한 것은 아닌가
한·미·일 동맹 무너지면 벌어질 상황 '예고편'일 수도
북한이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시위 이틀 만에 미사일을 쏘아올리는 도발을 했다. 대한민국 영공과 방공식별구역(KADIZ)을 휘젓고 다니며 한반도와 동북아 지역 안보를 흔들어대고 있는 러시아·중국과 발을 맞춰나가는 모습이다. 국제제재 와중에서도 쌀 5만t을 지원하겠다는 한국의 호의를 뿌리친 채 도발에 나선 것이다. 그런데도 정부 대응은 미온적이다.
경제에 일본의 보복 먹구름이 더해지고, 안보까지 위기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게 지금의 한국 상황이다. 경제와 안보라는, 국가 유지·발전의 두 축이 동시에 흔들리는 복합 위기다. 누적된 내우(內憂)에 주변 국가들이 치밀하게 준비·기획한 듯한 외환(外患)이 동시에 덮쳤다. 경제는 어렵다고 해도 순환 주기가 있고, 정책 변화 여부에 따라 회복이 가능하다. 안보는 다르다. 국가의 자존과 존엄이 심각하게 훼손되고 자주국방이 무너지면 회복불능 지경으로 추락한다. 말 그대로 국가의 존망이 달린 것이다.
다시 돌아봐도 지난 23일 독도 영공과 주변 동해 상공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미리 준비된 러시아와 중국의 ‘연합 도발’로 일본 전투기까지 4개국의 군용기 30여 대가 뒤엉킨 일촉즉발의 위기였다. KADIZ를 무단으로 활개친 넉 대의 중·러 전략폭격기는 총 28기의 순항 핵미사일을 실을 수 있는 가공할 만한 ‘핵무기’였다.
중국은 설정된 KADIZ를 인정하는 것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 영공을 침범한 러시아는 “한국 공군이 공중난동을 부렸다”는 억지까지 부리고 있다. 사과는커녕 침범 사실에 대한 과학적 증거까지 부인하는 판이다. 북한핵 해결 국제협상에서 나타났던 ‘코리아 패싱’(한국 배제)과는 또 다른 차원이다. 도대체 한국을 어떻게 보길래, 어쩌다 한국은 이렇게 만만한 상대가 된 것인가.
안보가 위협받는 심각한 사태가 벌어졌는데도 청와대는 엄중 대응은커녕 파장을 축소하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무슨 일이, 왜 벌어지고 있으며, 어떻게 대응하겠다는 대국민 설명이 없다. 일본을 향해서는 “의병이라도 일으켜야 한다”며 기세등등하더니, 중·러에 대해서는 정반대다.
이 즈음 청와대와 안보외교당국 행태는 대한민국 국민을 안심시키기보다는 도발 당사국인 러시아와 중국 심기를 더 의식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공연한 의심까지 들게 한다. 북한에 대해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러다 비핵화의 목표도 일정도 흐지부지돼 ‘북한=핵보유국’으로 굳어질 수 있다는 의구심이 커져간다.
스크럼을 짠 듯이 한·미 동맹과 한·미·일 안보협력체제의 틈을 파고드는 중·러·북의 도발은 중국이 주도했더라도 무섭지만, 북한이 기획했다면 더욱 가공할 일이다. 행여라도 우리 정부가 도발을 감행한 국가들에 엄중한 경고와 상응조치를 하지 않고 저들의 ‘선의(善意)’에 기대는 식의 대응을 하는 일은 절대 없어야한다. 러시아가 적반하장 주장을 늘어놓는 모습은 이런 불안감을 떨칠 수 없게 한다. 정부가 ‘아무렇게나 대해도 되는 나라’를 자초한 측면은 없는지 자성할 필요가 있다.
조금이라도 허점을 보이면 그 틈으로 달려들어 먹잇감으로 삼는 게 국제사회의 냉정한 약육강식 생태계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국가 간 관계의 이런 원초적 메커니즘은 바뀌지 않는다.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규제가 그렇지 않은가. 중국이 국방백서를 통해 ‘사드 타령’을 되풀이하는 것도 우리 정부가 냉철하지 못했고, 단호하지 못한 탓임을 부인할 수 없다. 중국 측에 사드 추가배치를 않겠다는 등 이른바 ‘3불(不) 약속’을 한 게 큰 패착이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국가의 자존과 존엄은 사즉생(死卽生)의 각오와 결기로 스스로 지켜야 한다. 자주안보가 흔들리고 외교가 비굴해지면 주권을 침탈 당한다는 것은 한 세기 전 열강의 시대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한·일 관계에 균열이 드러나자 날카로운 이빨을 여지없이 드러낸 중국·러시아·북한의 동시다발 도발은 그래서 걱정스럽다. 그동안 한반도 안보균형을 지켜온 한·미·일 자유주의 동맹이 무너질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보여주는 예고편일 수 있다.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