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경제교육재단(FEE) 창립자 레너드 E 리드의 1958년 에세이 ‘나는 연필입니다(I, Pencil)’의 요지다. 지구촌 사람들이 각자 이익을 위해 일하고, 분업과 교환을 통해 사회적 협동을 실현하는 시장경제 원리를 쉽게 설명해준다. 연필처럼 사소한 물품도 산업 생태계를 형성하는 데 무수한 이들의 자발적 참여가 있다는 얘기다.
고도 산업인 반도체도 생태계 가치사슬의 구성원리는 연필과 다르지 않다. 반도체는 크게 웨이퍼, 산화, 포토, 식각, 박막, 금속화, EDS, 패키징 등 8대 공정으로 나뉘고, 단계별로 하위 공정이 수십 개씩 달려 있다. 하나하나에 세계 최고 기술·소재·부품이 투입돼야만 최상의 품질을 낸다. 일본 수출규제와 관련해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이 “대기업이 국내 중소기업 불화수소를 안 사주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지만, 이는 ‘의리’가 아니라 ‘품질’의 문제다.
모든 공정을 홀로 감당하는 나라는 없다. 막대한 투자비와 기술 확보가 불가능해서다. 그런 점에서 세계 반도체시장은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협력하는 하나의 공동체나 다름없다. 인텔 퀄컴 등 미 IT업계가 한·일 양국 정부에 조속한 사태 해결을 촉구하는 서한을 보낸 배경이다. 세계 최고인 한국의 생산능력, 일본의 소재, 미국의 설계와 소비가 어우러져 세계 산업을 발전시켜왔음을 상기시킨 것이다.
‘나는 연필이다’에서 더 놀라운 것은 그 무수한 과정에 누군가 강제로 지시·감독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자생적 질서인 시장경제와 서로 이득이 되는 자유무역의 위대한 힘이다. 그러나 이런 비교우위 원리를 이해하는 정치인은 극히 드물다. 아베 일본 총리도 그 중 하나다. 게다가 반도체 공동체까지 파괴하려고 한다.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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