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반도체 공동체

입력 2019-07-25 18:19  

[ 오형규 기자 ] “나는 연필입니다. 약간의 나무와 흑연, 래커, 인쇄된 라벨, 금속, 지우개로 구성돼 있죠. 미국 오리건 삼나무를 철로를 통해 캘리포니아 제재소로 운반해 다듬죠. 흑연은 실론섬에서 캐오고, 지우개는 인도네시아 평지씨 기름과 염화황을 반응시켜 만듭니다. 지우개를 끼우는 쇠테는 구리와 아연의 황동입니다. 여기에 수백만 명이 애쓰지만 이들 중 몇몇 외에는 서로를 모른답니다.”

미국 경제교육재단(FEE) 창립자 레너드 E 리드의 1958년 에세이 ‘나는 연필입니다(I, Pencil)’의 요지다. 지구촌 사람들이 각자 이익을 위해 일하고, 분업과 교환을 통해 사회적 협동을 실현하는 시장경제 원리를 쉽게 설명해준다. 연필처럼 사소한 물품도 산업 생태계를 형성하는 데 무수한 이들의 자발적 참여가 있다는 얘기다.

고도 산업인 반도체도 생태계 가치사슬의 구성원리는 연필과 다르지 않다. 반도체는 크게 웨이퍼, 산화, 포토, 식각, 박막, 금속화, EDS, 패키징 등 8대 공정으로 나뉘고, 단계별로 하위 공정이 수십 개씩 달려 있다. 하나하나에 세계 최고 기술·소재·부품이 투입돼야만 최상의 품질을 낸다. 일본 수출규제와 관련해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이 “대기업이 국내 중소기업 불화수소를 안 사주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지만, 이는 ‘의리’가 아니라 ‘품질’의 문제다.

모든 공정을 홀로 감당하는 나라는 없다. 막대한 투자비와 기술 확보가 불가능해서다. 그런 점에서 세계 반도체시장은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협력하는 하나의 공동체나 다름없다. 인텔 퀄컴 등 미 IT업계가 한·일 양국 정부에 조속한 사태 해결을 촉구하는 서한을 보낸 배경이다. 세계 최고인 한국의 생산능력, 일본의 소재, 미국의 설계와 소비가 어우러져 세계 산업을 발전시켜왔음을 상기시킨 것이다.

‘나는 연필이다’에서 더 놀라운 것은 그 무수한 과정에 누군가 강제로 지시·감독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자생적 질서인 시장경제와 서로 이득이 되는 자유무역의 위대한 힘이다. 그러나 이런 비교우위 원리를 이해하는 정치인은 극히 드물다. 아베 일본 총리도 그 중 하나다. 게다가 반도체 공동체까지 파괴하려고 한다.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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