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첨에 1점 부족한데 추첨 순위 500번대로 밀려"
예당비율 500%로 늘리면서 '추첨' 규정 정비 못해
점수 낮아도 청약하면 당첨 가능 '요행수' 부추겨
[ 양길성 기자 ]
직장인 A씨는 지난달 서울의 한 아파트 단지에 청약했다. 청약 가점은 40점. 점수는 낮지만 정부가 예비당첨자를 500%로 늘린다고 해서 작은 희망을 걸었다. 그러나 2일 청약 결과 발표 후 A씨는 허탈감만 커졌다. 청약 커트라인(41점)보다 1점이 낮은데 예비당첨자 순번은 500번대를 받아서다. 예비당첨자 순번을 가점이 아니라 무작위 추첨으로 선정한 까닭이었다. A씨는 “가점 높은 실수요자 위주로 청약 제도를 바꾼다더니 현금 부자들이 청약할 기회만 더 커졌다”고 토로했다.
국토교통부가 가점 낮은 현금 부자들이 미계약 물량을 쓸어 담는 이른바 ‘줍줍(줍고 또 줍는다) 청약’을 막겠다며 지난 5월 내놓은 청약제도 개편안이 정반대 결과를 낳고 있다. 당해 청약 1순위에서 미달될 경우 예비당첨자 순번이 가점제가 아니라 무작위 추첨으로 정해지면서다. 가점이 높은 실수요자는 순위가 밀려 당첨 기회를 빼앗길 우려가 커진 반면 가점이 낮아도 현금이 많은 청약자는 오히려 더 계약하기 쉬워졌다.
주무관청인 국토부는 개편안을 내놓은 지 3개월 만에 뒤늦게 사태 수습에 나섰다. 정부의 잦은 청약제도 개편으로 실수요자가 겪는 불이익이 커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가점 높은 청약자 예비당첨 순번 밀려
2일 분양업계에 따르면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역 롯데캐슬 SKY-L65’의 전용면적 84㎡A와 176㎡ 두 주택형에서 예비당첨자 순번이 가점이 높은 순위가 아니라 무작위로 정해졌다. 전용 84㎡에선 당첨자 260명을 제외한 1089명이, 176㎡는 8명이 추첨으로 순번을 받았다.
예비당첨자 제도는 미계약 물량을 대비해 마련된 제도다. 당첨자의 계약 포기로 미계약 물량이 발생하면 예비당첨자에게 순번대로 계약 기회가 돌아간다.
국토부는 지난 5월 청약 예비당첨자 비율을 공급 가구 수의 80%에서 500%로 확대했다. 가점 높은 수요자에게 더 많은 청약 기회를 주려는 취지에서다. 예컨대 10가구를 모집하면 예비당첨자 대상이 50명(500%) 이상이어야 한다는 의미다. 당첨자(10명)를 포함해 청약 건수가 60건(청약 경쟁률 6 대 1) 이상일 때는 예비당첨자 순번을 가점으로 정한다.
하지만 ‘주택공급에 관한 규칙’에 따르면 접수된 예비당첨자 수가 모집할 예비당첨자 수보다 적으면 가점제가 아니라 추첨제로 뽑도록 돼 있어 가점제의 취지와 충돌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이번 청량리롯데캐슬 청약에서 전용 84㎡A와 176㎡의 예비당첨자 순번도 이 기준에 따라 추첨 방식을 통해 무작위로 정해졌다. 전용 84㎡A는 1089명이 가점과 무관하게 예비당첨자 순번이 정해졌다.
가점이 낮은 청약자가 높은 청약자보다 더 앞선 순번을 받은 사례가 속출하면서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다. 전용 84㎡A에 청약한 B씨는 “예비당첨자를 500%로 늘린다고 해서 당첨될 것이란 기대가 컸는데, 나보다 가점이 낮은 사람들이 오히려 앞선 순번을 받아 허탈하다”고 말했다.
“청약 과열 더 부추기는 꼴”
업계에선 정부의 청약제도 개편이 역효과를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지적한다. 예비당첨자 순번을 추첨으로 뽑으면 가점이 낮은 청약자까지 가세해 청약 과열을 더 부추길 수 있어서다.
분양대행사 산하의 최성욱 사장은 “가점제 취지에 맞게 예비당첨자들도 가점에 준해 순번을 매기도록 청약제도를 정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지적했다.
청약 업무를 맡은 금융결제원과 국토부는 이 같은 부작용이 나타나자 뒤늦게 수습에 나서고 있다. 국토부 관계자는 “예비당첨자 수가 공급 가구 수보다 적으면 예비당첨 순번을 추첨으로 정한다는 해당 조항과 청약 개편안이 수요자에게 혼란을 주고 있다는 점을 지난 1일 알게 됐다”며 “모집 인원 수를 계산할 때 1순위 당해지역과 기타지역을 하나로 합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분양 현장에서는 현실적으로 대다수의 청약 단지에서 예비당첨자 비율을 충족하는 청약 경쟁률(6 대 1)을 넘기기 힘든 점도 애로로 꼽고 있다. 실제 모집 가구 수를 넘겼음에도 미분양으로 처리되는 현장이 많기 때문이다. 정보업체 리얼투데이에 따르면 청약제도 개편안이 시행된 5월 20일 이후 청약한 53개 단지 중 1순위 청약에서 6 대 1 경쟁률을 넘긴 단지는 19곳에 그쳤다.
전문가들은 잦은 청약제도 개편에 따른 ‘예고된 악재’가 터진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심교언 건국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전문가도 부양가족 기준 등 까다로운 각종 규정을 찾아가며 가점을 계산하기 어렵다”며 “청약제도를 단순화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양길성 기자 vertig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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