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갈등에도 54년 지켜온 '정경분리'…아베가 깨면서 우방 '흔들'

입력 2019-08-02 17:40   수정 2019-08-03 10:00

과거사 - 경제협력 분리
'투 트랙 협력노선' 위기



[ 이미아 기자 ]
일본이 2일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수출절차 간소화 국가)에서 배제하면서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유지돼온 ‘투 트랙 협력 노선’이 사실상 무너졌다. 국교 정상화 후 지난 54년 동안 과거사와 독도 영유권 등 기존 문제 및 경제·외교·군사 등 현안을 분리 대응해온 한·일 정부의 룰이 깨졌기 때문이다.

전략적으로 복원된 한·일 관계

박정희 전 대통령과 사토 에이사쿠 전 일본 총리의 1965년 ‘한·일 기본조약’ 조인은 양국 정부의 철저한 계산에 따른 결과였다. 미국의 영향 아래 이웃나라로서 경제·안보 분야에서 손을 잡아야 했다. 한·일 수교 당시 한·일 청구권협정, 한·일 어업협정 등 5개 조약을 맺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 시절엔 나카소네 야스히로 당시 총리가 “한국인에게 큰 고난을 준 것에 깊은 유감”이라고 사과하며 이른바 ‘담화 정치’의 막이 올랐다. 김영삼 정부 때는 고노 요헤이 당시 관방장관이 ‘고노 담화’(1993년)를 통해 일본 정부의 위안부 강제동원을 처음으로 인정했다. 1995년에는 무라야마 도미이치 당시 총리가 일본의 식민지배에 공식 사죄하는 뜻을 밝힌 ‘무라야마 담화’를 발표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전 총리가 1998년 발표한 ‘21세기를 향한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은 한·일 관계를 가장 긍정적이고 미래지향적으로 나타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대중 정부는 이를 계기로 일본 문화의 단계적 개방을 시작했고, 일본 내 한류 붐도 이때부터 일었다. 노무현 정부 시절엔 이른바 ‘셔틀 외교’가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당시 총리가 현안을 협의하기 위해 매년 양국을 오가며 회담하는 관행이 자리잡았다.


독도 영유권, 과거사 등 진전 없어

한·일 정부와 민간의 교류는 활발했지만 일본군 위안부와 강제징용, 과거사와 역사 교과서 왜곡, 독도 영유권 문제 등 기존 갈등은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

가장 첨예한 대립이 벌어진 분야는 역사 교과서와 독도 문제였다. 일본 정부는 1982년 고등학교 교과서에 일제 침략을 ‘진출’, 3·1운동을 ‘폭동’이라 규정해 큰 논란을 빚었다. 2001년 4월엔 우익 성향의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측에서 제작해 후소샤에서 출간한 교과서가 검정을 통과해 물의를 빚었다. 일본 문부과학성은 ‘독도가 일본 영토’란 주장을 포함한 내용의 학습지도요령 해설서를 중학교(2014년)부터 시작해 고등학교(2017년), 초등학교(2019년)까지 단계적으로 적용했다. 학습지도요령 해설서는 교과서 집필 기준 및 일선 교사의 학습지도 지침으로 학생 지도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책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2012년 8월 현직 대통령으로선 처음으로 독도를 방문했다. 일본은 정부 차원에서 강력히 항의했고, 이때부터 한국에 대한 일본 내 여론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일본은 자국의 영유권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선 총리나 장관 차원의 개인 담화는 있었지만 정부 차원의 공식 사과는 아직까지 없다. 일본은 2017년 부산 주한 일본총영사관 앞 소녀상 건립을 빌미로 통화스와프 재체결 협상 중단을 발표하기도 했다.

‘정경분리 원칙’ 무시한 아베

전문가들은 아베 신조 내각의 이번 경제보복이 비난받는 근본적 원인은 한·일 협력을 지속해온 원동력인 ‘정경 분리’ 원칙을 깨버린 데 있다고 지적한다. 강제징용이란 과거사 문제를 억지로 무역과 연관시키면서 자칫 한·일 관계 전체를 마비시킬 위험 요인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아베 총리가 반한(反韓) 여론을 이용해 ‘강한 일본’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조성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일본 언론들도 아베 내각의 이 같은 행위에 비판적이다. “일본이 중시해온 자유무역의 원칙을 왜곡했다”(마이니치신문) “국제정치의 도구로 통상정책을 이용하려는 발상”(니혼게이자이신문) “자유무역의 원칙을 왜곡하는 조치”(아사히신문) 등의 비판이 쏟아졌다.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 우치다 마사토시 변호사 등 일본 사회지도층 인사들은 지난달 말부터 ‘한국이 적인가’라는 제목의 성명을 내걸고 수출규제 철회 촉구 서명운동을 하고 있다.

라종일 전 주일 대사는 “여태까진 한국이 일본에 과거사의 책임을 묻는 입장이었지만 지금은 일본이 한국을 향해 ‘약속을 안 지키는 나라’라며 따지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또 “자민당과 일본 행정부 내에서 아베 총리의 독주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이를 막을 힘이 약하다”고 덧붙였다.

이미아 기자 mi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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