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안전·환경규제 족쇄 풀어야
7000여개 등록 의무화한 '화평법'
가동 멈추고 검사 받으라는 '화관법'
내년에는 '산안법'까지 시행
[ 도병욱/나수지 기자 ] 화학제품을 생산하는 경남의 한 중소기업은 최근 생산품 수를 줄이기로 했다. 올해 1월 개정된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에 관한 법(화평법)’이 시행되면서 정부에 의무적으로 등록해야 할 화학물질이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이 회사 관계자는 “화학물질을 하나 등록하려면 해외에서 관련 정보를 구입해야 하는 등 수천만~수억원이 들어간다”며 “중소기업은 감당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정부가 일본의 경제보복에 맞서 대규모 예산 투입 등을 통해 핵심 소재·부품 국산화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지만, 산업현장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기업을 옥죄는 각종 환경규제가 획기적으로 풀리지 않으면 소재·부품 국산화 선언도 공염불에 그칠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신제품 개발해도 규제에 ‘발목’
화평법은 ‘가습기 살균제 사망 사건’을 계기로 2013년 제정됐다. 각종 제품에 쓰이는 화학물질을 더 엄격하게 관리하자는 취지에서다. 2015년 화평법이 시행된 이후 기업들은 화학물질을 사용하거나 수입할 때 성분, 독성 등 수십 가지 정보를 환경부에 등록해야 한다.
기준은 갈수록 깐깐해졌다. 지난 1월 시행된 개정 화평법에 따르면 기업들은 연간 1t 이상 제조하거나 수입하는 화학물질을 모두 정부에 등록해야 한다. 법이 개정되면서 기업들이 등록해야 할 물질의 종류는 500여 개에서 7000여 개로 급증했다. 화평법을 제정할 때 기준으로 삼았던 유럽연합(EU)의 ‘화학물질 등록·평가제도’보다도 기준이 더 까다롭다고 경제계는 반발하고 있다.
화학물질관리법(화관법)도 기업들에 큰 부담이다. 화관법은 화학물질을 쓰는 공장에 안전진단 의무를 부과했다. 문제는 법 시행(2015년 1월) 전에 지어진 공장도 검사를 받아야 한다는 점이다. 반도체·디스플레이업계에는 비상이 걸렸다. “검사를 받으려면 라인을 세워야 할 가능성이 높은데 이 경우 최대 수조원의 손실이 불가피하다”는 게 업체들의 얘기다. 화관법은 국내에서 제조하거나 수입한 모든 화학제품의 명칭과 용도 등을 정부에 제출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부산의 한 도금업체는 올해 초 친환경 납도금 약품을 개발했지만 아직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새 약품을 쓰려면 약품 탱크를 새로 지어야 하는데, 화관법에 규정된 기준을 맞추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업체 관계자는 “까다로운 화관법의 안전 기준을 모두 충족하려면 공장을 옮겨 새로 짓는 수준의 비용이 든다”고 말했다.
환경단체에 막힌 불산공장
내년에는 산업안전보건법(산안법)도 시행된다. 유해·위험 작업의 도급 금지와 함께 고용노동부 장관에게 중대재해 발생 사업장에 대한 작업 중지 명령권을 부여하는 내용 등이 들어 있다. 한국경영자총협회 등은 고용부 감독관 한 명의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대형 공장이 수개월씩 멈춰설 수 있다고 우려했지만, 정부와 국회는 이런 목소리를 외면했다.
산업현장에서는 안전관리 강화라는 취지는 좋지만, 지나친 규제가 기업의 의욕을 꺾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우현 OCI 부회장은 지난달 10일 문재인 대통령 주재로 청와대에서 열린 기업인 간담회에서 “환경 관련 규제가 상당히 복잡한 상황에서 불화수소 등에 대한 국내 투자는 이뤄지기 힘들다”고 꼬집었다. 강호갑 중견기업연합회 회장도 “규모가 작은 회사는 화관법과 화평법 등의 규제를 지키면서 사업을 하기 힘들다”고 호소했다.
안전 사고가 날 때마다 기업을 규제하는 법을 내놓는 정치권도 문제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화관법은 구미 불산(불화수소) 누출사고, 산안법은 태안화력발전소 사내 하도급 근로자 김용균 씨 사망사고 등이 발단이 됐다. 두 법 모두 여론에 떠밀려 국회에서 채 한 달도 논의하지 않은 채 일사천리로 처리됐다.
시민·환경단체의 ‘묻지마 반대’도 기업들을 움츠러들게 하는 요인으로 꼽힌다. 글로벌 화학기업 멕시켐은 2012년 전남 광양에 연간 13만t 규모의 불화수소 공장을 건설하려고 했지만, 지역 환경단체 등의 반발로 포기했다. 한 중소기업 대표는 “그동안 화학물질 관련 규제 강화에 적극 나섰던 정부와 정치권이 이제 와서 규제를 찔끔 풀어줄 테니 소재를 국산화하라고 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며 “어설픈 지원보다는 규제를 과감하게 푸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도병욱/나수지 기자 dod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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