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광엽 기자 ] 일본 전문가인 공로명 전 외교부 장관은 “한국 정부의 자작극 같은 느낌이 든다”고 한 인터뷰에서 조심스레 말했다. 대법원의 ‘징용 판결’ 이후 일련의 정부 대응이 너무나 이해하기 힘들고, 파국을 자초하는 듯하다는 걱정이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를 히틀러에까지 빗대는 청와대 등의 격렬한 언행에서 당혹감을 떨쳐내긴 어렵다. 돌아보면 ‘개인청구권이 소멸됐다’는 두 나라 정부의 오랜 입장과 판결의 간극을 해소하자는 일본의 거듭된 요청에 듣는 척도 하지 않았던 작년 10월부터 의구심이 커지기 시작했다. 북한이 무시무시한 화력을 과시하는 와중에 문재인 대통령이 일본 경제보복 해법으로 ‘평화경제’와 ‘남북경협’을 강조하고 나선 것도 뜬구름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다.
친일·매국 논쟁 반세기 만의 재연
‘왜 저렇게까지 할까’라는 궁금증에 더불어민주당 일본경제침략대책특별위원장인 최재성 의원이 답을 줬다. 그는 “1965년 엉터리로 만든 한·일 협정 청산이 우선”이라고 했다. ‘범여권’으로 불리는 정의당도 ‘65년 체제 청산특별위원회’ 설치를 요구하고 나섰다. ‘굴욕적인 대일 협상으로 국익을 팔아넘겼다’던 6·3세대의 케케묵은 주장이 반세기 만에 재현되는 모습이다.
6·3세대는 “왜놈과의 국교 정상화는 친일·매국”이라며 거리를 메웠지만 경부고속도로 반대투쟁처럼 ‘무지(無知)’에 기인한 오판이었다. 도리어 2005년 관련 외교문서가 공개된 이후에는 ‘국익을 지킨 협정’이라는 평가가 쏟아졌다. ‘문서 공개 심사단’의 학자들은 “나도 대학생 때는 굴욕회담이라고 여겼지만, 자료를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거나 “노련한 일본 정부를 상대로 거둔 큰 외교적 승리”라는 소감을 밝혔다. 시위대의 일원이었던 좌파성향 최장집 고려대 교수 역시 “세월이 지나고 보니 국교 정상화는 필요한 일이었고, 자본 조달(청구권)도 평가할 만하다”며 긍정적으로 돌아섰다.
한·일 청구권협정은 한국과 일본 최고의 정치·경제·법률 전문가들이 13년 동안 씨름한 결과물이다. 식민지배와 피지배의 복잡다단했던 현실과 가슴 깊이 배긴 울분을 넘어 65년 체제를 창출해냈다. 새로운 국제질서 속에서 양국은 번영의 길을 질주했고, 아시아 이웃 나라들과 함께 ‘자유·개방·시장’이라는 세계사의 큰 흐름을 주도했다.
문명의 최전선 지켜낸 한일협정
65년 체제 출범의 주역은 2차 세계대전의 ‘유일한 승자’ 미국이다. 미국은 일본을 산업국가로 부흥시켜 ‘대(對)소련 방파제’로 활용하는 동북아 안전보장체제를 구상했다. 소련의 급팽창과 1949년 중국 공산당 정부 수립에 따른 위기감 때문이었다. 미국은 한·일 양국의 경제협력과 발전을 촉진해 ‘한반도 안전보장체제’를 구축한다는 전략 아래 일본의 양보를 압박해 청구권 협상을 성사시켰다. 이렇게 꾸려진 ‘동북아 자유국가들의 연대’는 가장 호전적인 공산국가에 맞서 문명의 최전선을 방어하는 세계사적 사명을 훌륭하게 수행해냈다. 미국이 65년 체제를 한·미·일 삼각동맹과 사실상 동의어로 간주하는 배경이다.
문재인 정부의 65년 체제에 대한 이탈 조짐은 곳곳에서 감지된다. 중국 러시아와도 가동 중인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을 ‘일본과는 못하겠다’고 운을 떼는 것부터 그렇다. 문 대통령은 한 달 전 ‘G20 오사카 정상회의’ 귀국길에 “우리는 거대한 물줄기를 바꾸고 있다. 서로 믿고 격려하며 지치지 말고 가자”는 메시지를 SNS에 띄웠다. 하지만 65년 체제의 균열이 보이자마자 러시아와 중국 전투기가 떼지어 한국 영공을 휘저었고, 미국은 일본 편을 드는 모습이다. ‘신한반도 체제’의 동력이 무엇인지 답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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