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산화 무분별하게 강제하면
반도체 경쟁력까지 잃을 수도
[ 고재연 기자 ]
“정부가 아니라 대기업 주도의 소재·부품·장비 국산화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박영수 솔브레인 연구소장(부사장)은 7일 서울 양재동 엘타워에서 열린 ‘일본의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 수출규제에 대한 과학기술계 대응 방안’ 긴급 토론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일본의 대(對)한국 수출규제를 계기로 소재·부품·장비 국산화 논의가 급물살을 타는 가운데 관련 논의가 과거처럼 ‘정부 주도’가 아니라 ‘대기업 주도’로 이뤄져야 한다는 의미다. 솔브레인은 일본으로부터 소재 수입이 잠정 중단된 에칭가스(고순도 불화수소) 국산화에 성공한 기업이다.
박 부사장은 정치권에서 얘기하는 무분별한 국산화에 대해 경계했다. 그는 “소재·부품·장비 국산화를 강제하면 한국이 쌓아올린 반도체 경쟁력까지 잃어버릴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며 “최고의 소재·부품·장비로 반도체를 제조하는 미국 마이크론, 일본 도시바보다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마구잡이식 국산화가 아니라 최고의 제품을 가장 싸게 공급할 수 있는 대표 기업을 육성해야 한다는 얘기다.
박 부사장은 “대기업의 중장기 로드맵에 바탕을 둔 국산화 과제가 필요하다”고도 강조했다. 소재·부품·장비를 국산화하기 가장 좋은 방법은 ‘기술의 변곡점’에서 관련 기술을 선점하는 것이다. 솔브레인도 삼성전자가 세계 최초로 평면 낸드플래시에서 3차원(3D) 낸드플래시로 전환하는 시기에 고선택비 식각액을 개발하면서 시장을 선점할 수 있었다.
반도체 장비 기업 주성엔지니어링의 황철주 회장은 “혁신은 위험요소(리스크)와 속도, 시간을 극복할 때 가능하다”며 “지금까지 공무원과 대기업은 리스크를 지려 하지 않았고, 중소기업은 대기업이 원하는 속도와 시간을 맞추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를 극복해야 ‘이기는 기술’을 개발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또 다른 장비 기업인 원익IPS의 이현덕 사장은 “글로벌 최고 장비 회사들과 비교해 국내 업체들의 매출 대비 연구개발(R&D) 투자 규모는 10분의 1도 되지 않는다”며 “기술 난도가 점차 높아지는데 R&D 투자엔 소극적이다 보니 이미 글로벌 기업들이 개발한 제품을 국산화하는 정도의 기술 개발에 머무르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적은 R&D 비용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려면 R&D에 세제혜택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종수 메카로 사장은 “화관법·화평법 때문에 배(기술 개발 비용)보다 배꼽(인허가 비용)이 더 크고, R&D에 집중하기보다 주 52시간제 시행 등으로 근로자들을 달래고 대책을 세우는 데 시간을 다 쓰고 있다”고 토로했다.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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