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지도 없는 여행책…'삶의 방향'을 안내하다

입력 2019-08-08 17:40   수정 2019-08-09 00:45

윤정현 기자의 독서공감


[ 윤정현 기자 ] 여름 휴가지로 떠나는 가방에 책 한 권만 넣을 수 있다면 어떤 책을 고를까.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여행을 간다면 목적지 주변의 지도와 가이드북이 필수였다. 하지만 스마트폰이 등장한 이후 나라 이름이나 도시명이 곧 제목인 가이드북은 짐이 됐다. 정보가 많아 친절할수록 더 무거운 짐일 뿐이다. 책 대신 스마트폰을 챙기고, 해외라면 데이터 요금제나 현지에서 유심 구입 방법만 알아서 가면 된다. 해당 지역 언어와 지도, 숙박과 맛집 정보까지 모두 스마트폰으로 찾을 수 있다.

그렇게 여행 책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완전히 멀어져 버린 것일까. 본격 휴가철로 접어든 요즘 교보문고의 베스트셀러 종합순위 1위는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 2위는 유시민의 <유럽 도시 기행1>이다. <유럽 도시 기행1>은 인문, <여행의 이유>는 에세이로 분류돼 있지만 여행과 관련한 책이기도 하다. 다만 단순한 여행 정보가 아니라 여행과 삶의 의미를 되새기고 역사와 문화를 읽어가는 이야기가 담겼다.

올 3월 출간된 정여울 작가의 <빈센트 나의 빈센트>도 사실 여행책이다. 작가는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가득하던 20대 때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 앞에서 눈물을 쏟았다. 당시의 경험을 기반으로 지난 10년간 고흐의 길을 따라 걸었다. 고흐가 그림 공부를 한 벨기에 안트베르펜미술학교와 보리나주 작업실, ‘밤의 카페테라스’ ‘까마귀가 나는 밀밭’ 등의 배경인 프랑스 아를과 생레미, 동생과 나란히 묻힌 오베르쉬르우아즈까지 그의 흔적과 풍경을 작가 특유의 감성으로 풀어낸다. “빈센트는 내게 선물했다. 내게 불가능할 것으로 보였던 모든 세계를, 내게 허락되지 않는 모든 세계를 감히 꿈꾸는 용기를.”

훌쩍 떠나고 싶게 만드는 책은 <걷는 사람, 하정우>다. 눈 뜨자마자 러닝머신에 오르고 하루 평균 3만 보, 많게는 10만 보까지 걷는 배우 하정우의 에세이다. 걷는 이야기지만 실은 걸으면서 드는 생각의 모음이기도 하다. “돌아보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오직 걷기밖에 없는 것만 같았던 시절도 있었다”는 고백은 위로가 된다. “처한 상황이 어떻든, 손에 쥔 것이 무엇이든 걷기는 내가 살아 있는 한 계속할 수 있다”는 문장은 떠나고 싶은 욕구를 자극한다. 그가 즐겨 가는 하와이 곳곳의 걷기 좋은 코스들은 책의 부록 같다.

최근 선보인 ‘본격 여행책’들도 에세이 형식이 대세다. 11년간 65개국 500개 도시를 누빈 여행 크리에이터 청춘유리가 쓴 <당신의 계절을 걸어요>와 엄마와 함께한 배낭여행으로 이름을 알린 여행작가 태원준의 <딱 하루만 평범했으면>, 워킹맘에서 전업주부가 된 진명주 씨가 아이와 함께 두 달간 동남아시아를 여행한 <떠난다고 해서 달라지진 않지만> 등이 대표적이다.

교보문고에 따르면 올 상반기 판매 권수가 전년 동기 대비 가장 크게 하락한 분야는 여행(-11.2%)이었다. 하지만 여행 자체에 대한 흥미가 식은 건 아니다. 여행을 즐기는 방식, 여행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 것뿐이다. 김영하 작가는 <여행의 이유>에서 말한다. “자기 의지를 가지고 낯선 곳에 도착해 몸의 온갖 감각을 열어 그것을 느끼는 경험. 한 번이라도 그것을 경험한 이들에게는 일상이 아닌 여행이 인생의 원점이 된다.” ‘인생의 원점’을 향해 떠나는 오늘, 어떤 책을 챙겨볼까.

hi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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