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익률 우선 운용원칙 흔들어
노경목 경제부 기자 autonomy@hankyung.com
[ 노경목 기자 ] 국민연금이 또 한번 동네북이 됐다. 투자 규모와 영향력이 커지면서 안 그래도 투자 건마다 정치권과 시민단체 등의 간섭이 늘어나는데 이번엔 일본 ‘전범기업’ 투자가 타깃이 됐다.
전범기업은 보통 일제 치하에서 강제징용으로 동원된 노동력을 이용했던 기업을 일컫는다. 2014년 국무총리실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지원위원회’가 분류한 기준을 적용하면 미쓰비시 도요타 신에츠화학 등 일본 주요 대기업이 해당한다. 국민연금은 이 중 75개 기업에 1조2300여억원을 투자하고 있다. “당장 투자를 중단해야 한다”는 주장이 시민단체와 일부 매체를 중심으로 나오고 국회에는 투자를 막는 법안까지 제출됐다.
국민연금과 주무부처인 보건복지부는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복지부 담당자들은 “투자를 중단하면 잠깐 기분은 좋겠지만 결국 우리가 상처 입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가장 큰 문제는 기금 운용의 중립성 훼손이다. 국민연금을 복지부 산하에 둔 주된 이유 중 하나가 기금 운용에 대한 정치적 영향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다. 반일 여론에 따라 이를 허물면 이후에도 중립성을 보장하기 힘들어진다. 정부가 국민연금 운용에 개입하는 사례가 늘면서 ‘연금 사회주의’ 논란이 불거지는 가운데 해외 투자 건까지 정부와 정치권의 입김에 휘둘릴 것이라는 우려가 커진다.
한국 정부가 나서서 경제갈등을 확대하는 모습으로 비치는 점도 문제다. 한·일 경제갈등은 일부 상품의 수출규제를 놓고 벌어지고 있다. 국민연금이 특정 일본 기업 투자를 중단하면 갈등이 금융·투자 영역으로 확대되는 결과를 낳는다. “일본이 자유무역 질서를 흔들고 있다”고 국제사회에서 비판하는 한국 정부의 입지가 줄어들지 모른다.
국민연금 측에서는 더 실질적인 어려움을 제기한다. 한국 기업에 대한 일본 연기금 투자가 국민연금의 일본 기업 투자 대비 6~7배에 이른다는 점이다. 서로 투자를 중단하면 한국이 훨씬 큰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해외 주식 투자 특유의 구조도 발목을 잡는다. 대부분 해외 주식은 해당 국가의 주가지수를 따라가는 인덱스 펀드 형태로 이뤄진다. 전범기업이라는 이유로 일본 대기업을 배제하면 인덱스 펀드의 구조 자체가 흔들려 정상적인 투자가 불가능해진다.
그럼에도 복지부 일각에서는 결국 논의 자체는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분위기다. 국민연금 역시 “민간위원들이 기금 운용위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까지 막을 순 없다”고 했다. 하지 않아야 할 수많은 논리적 이유에도 국민감정에 떠밀리는 모양새다. 국민의 노후를 책임진 국민연금의 운용과 관련해 더욱 냉정한 판단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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